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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09. 2019

압록강은 흐른다

  

1. 통한의 강압록강     


압록강,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뭉클함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다. 수백수천 년, 아니 억겁을 흐르며 지금껏 한시도 쉬지 않고 흘렀을 압록강이다. 바람 불면 흔들리기도 했을 터이고 눈보라 치면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 고고히 흘렀을 터이다. 그 압록강가에서 회한을 느끼며 압록강을 따라간다. 그냥 흐르는 압록강처럼 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혼자 편하게 살아보겠다고 압록강을 건너 백성들을 버리고 명으로 망명을 하려 했던 선조 임금, 이때 압록강은 조선 민중에게는 통한의 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고려말 1388년 요동 정벌 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까지 왔다가 개경으로 회군을 한다. 그리고는 최영 장군을 죽이고 조선의 국부가 된다. 이때 압록강은 또다시 통한의 강이 된다.

     

그 후 1950년 9월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 달 만에 압록강까지 진격을 한다. 육군 6사단 7 연대(초산부대)가 제일 먼저 압록강에서 승리의 물을 길어 올리던 순간,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이 전쟁에 개입한다. 오히려 중공군 개입의 명분을 제공한 맥아더의 작전 실패는 1.4 후퇴를 해야만 했기에 비극적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후 남북 간의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두고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2019년 2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탄 전용열차가 2월 23일 늦은 오후 중국 랴오닝(遼寧) 성 단둥(丹東)에 들어선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하노이에서 회담을 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김 위원장은 60시간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지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측의 불성실한 회담 진행으로 결렬되자 또다시 60시간의 기차여행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압록강을 건너며 어쩌면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압록강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함석헌 선생은 평소 “압록강으로 가야지”라고 하셨다. 선생의 고향 산천이 압록강가에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자나 깨나 압록강가를 오르내린다. 꿈을 꾸어도 그 언덕 그 강변에서 노는 그 압록강엘 가야지, 그 고향엘 돌아가야지.”


“압록강은 장관이다. 우리 집이 붙어 있는 그 뒷산에 오르면 깎아 세운 낭떠러지가 서 있고, 그 밑으로 강이 흐른다. 이것이 억만년 물과 물의 싸움의 기록이다. 물은 제가 이겼노라 할지 모르고, 바위는 저야말로 이겼노라 할지 모르지만, 이긴 것은 물도 바위도 아니요, 그 장관이 오직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낭떠러지를 밀곶, 뒤령곶이라 부른다. 한문자로 써서 미곶(彌串) 혹은 진곶(辰串), 도룡곶(屠龍串)이다. 미(彌)도 진(辰)도 다 미리 곧 용(龍)을 표시하는 말인데, 용천 일대에서는 지명에 용자가 붙은 데가 많다. 가장 높은 산이 용골산(龍骨山)이요, 그 서쪽에 용아산(龍牙山), 그 남쪽에 미리산, 그 옆에 용바위, 모두 용이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압록강을 상징한 것 아닌가? 되령곶에서 용을 잡았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까지도 가뭄이 심할 때는 그 바위에 피를 바르면 비가 온다는 말이 있는 것은 이 자연과 사람이 싸워오던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함석헌, 압록강에 가자” 중에서)

    

압록강은 쉬지 않고 흐른다.


선생은 어렴풋이 압록강을 용이 사는 강인 줄 느끼고 있었던 게다. 압록강 물결을 들여다보면 문득 고주몽의 얼굴이 비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유화 부인의 이야기며, 주몽이 강을 건널 때 고기 떼가 다리를 놨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모두가 압록강에서 볼 수 있던 신화 같은 이야기들 아닌가? 

    

압록강가에서 만날 수 있는 신화 속 위인들과 잔 고기떼같이 이름 없는 민중들, 압록강은 그런 신화를 품고 있었다. 그 앞에 서면 우리의 다하지 못한 역사적 책임, 깨져나간 역사적 비전까지 부끄러워지고 슬퍼지고 심지어 주먹을 쥐고 결단과 결심을 해야 하는 일이 울분을 느끼게 한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 “압록강이 국경이 되면서 시작되었다”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압록강을 우리 역사의 ‘고소장’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압록강이 우리가 다하지 않은 책임을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압록강에 가서 새 역사의 약속을 말하고, 그 약속을 지키도록 노력을 해 묵은 죄를 면하도록 하자고 한다.          


2. 압록강은 흐른다    

 

1920년 당시 21살의 청년 이의경은 고향 황해도 해주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간다. 탑골공원에서 삼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는 바람에 다니던 서울의학전문학교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달빛이 비치는 압록강을 건너고 난 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국산천을 보기 위해 언덕으로 올라가 뒤돌아보니 우리 마을과 꼭 닮은 마을이 보이고 여전히 압록강은 흐르고 있었다.”(이의경, ‘압록강은 흐른다’ 중에서) 의경이 마지막 본 조국의 모습이었다.  

   

압록강  건너 북한 마을


의경은 상해에 머무르면서 상해 임시정부 소속 항일단체였던 대한 청년외교단에서 일본의 식민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는 외교 시보를 발행한다. 그리고 몇 달 후 드디어 여권을 발급받고 유럽으로 간다. 그가 가려는 곳은 독일이었다. 상해에서 의경은 배를 타고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여행길에 나선다.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거쳐 드디어 독일 뮌스터 슈바르 자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한다. 이곳에 오기까지 의경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의 도움을 받았다. 의경을 데려다준 안봉근은 베를린으로 떠나고 의경은 홀로 수도원에서 지낸다.      


의경은 의사가 되려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뮌헨 대학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의경은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고향 이야기였다. 그가 쓴 이야기는 <Der Yalu fliesst>(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1946년 뮌헨에서 출간된다.     


이 책에서 저자 의경은 미륵이란 필명을 사용한다. 이 책은 전후 상실감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에게 지난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좋은 반응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독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명문장으로 수록되는 영예까지 얻는다. 그러나 안탑깝게도 1950년 3월 20일 이의경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51세의 나이에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독일에 유학 온 전혜린은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미륵, 아니 이의경이 건넌 압록강이 어떤 강인지, 그리고 언제까지 통한의 강으로 남아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그때와 다를 바가 없이 일제의 주구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회한의 눈물은 멈추어지질 않는다. 압록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3.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   

  

<삼국사기>에 "유리왕 22년(서기 3년) 10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국내성이 있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성(集安縣城)은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남으로 압록강이 동쪽 용산(龍山), 북쪽 우산(禹山), 그리고 서쪽으로 칠성산(七星山)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앞에는 압록강이 있어 배산임수의 천연 요새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는 졸본에서 국내성, 지금의 집안으로 옮겨온다. 북쪽에 있던 졸본성에서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세 번째 천도를 하기까지 이곳 국내성을 기반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다.    

 

집안에서 압록강 건너편에 보이는 북한 만포시 


집안은 압록강 중류에 있다. 북한의 만포시를 건너다보며 마주하고 있다. 19세기 말 집안에는 20여 호 정도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 지은 건물들 밑으로 고구려의 옛 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국내성 지역에는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塚) 등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고구려 문화의 보고로 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압록강변을 따라 펼쳐진 집안시 그 중심에 국내성이 자리했을 것이다. 압록강 건너 맞은편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스친다.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강변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과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아이들 모습도 보인다. 어디를 봐도 다른 나라 같은 기분이 들지를 않는다. 그 옛날에는 모두가 국내성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던 국내성 성벽 흔적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성벽이 있었음직한 자리에는 대신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주거지역으로 변했다. 그 사이 성벽은 부서지고 성을 쌓은 돌무더기는 주택용 석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제는 국내성 성벽이라고 느낄만한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집안은 도시 전체가 고구려 유적이라 해도 될 정도인데, 특히 1만 2천 개의 고구려 고분들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역사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 중 26기의 왕릉급 무덤과 귀족 무덤을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     


국내성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성과 함께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고구려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성 안에 있었을 왕궁은 여전히 그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으니 선조께 죄를 짓는듯하여 또다시 통한의 눈물이 흐른다.          


집안 시내와, 주거지역 아파트(축대처럼 보이는 것은 국내성 성벽돌을 쌓아놓은 것이다.)
집안 박물관에 설치한 비석과 광개토대왕 비석
광개토대왕 무덤과 장수왕 무덤



4. 압록강을 넘어서는 열강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압록강 지역에서 청군과 일본군은 전투를 벌인다. 황해와 접하고 있는 압록강 하류에서 황해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1894년 9월 17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일본군 1만 명은 황해 해전에서 청군의 북양함대를 격파하고 압록강 유역에 상륙해 남만주로 건너간다. 

    

이후 일본군은 단동에 무혈입성하고 그곳에서 일본 육군은 2개 진로로 나뉘어 계속 진군한다. 가쓰라 다로 중위가 이끄는 군대는 전략적 요충지인 여순항에 접근하고 오쿠 야스카타 중위가 이끄는 군대는 만주의 중심지 봉천으로 진군한다. 

    

이 전쟁에서 일본 제국 육군 제1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만주로 가는 길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 육군과 최초로 격돌한다. 당시 압록강을 경계로 조선과 청나라가 마주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은 곧바로 청나라를 비롯해 러시아와도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이처럼 압록강 지역은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압록강 상류에 환도성을 쌓아 전시 수도로 활용했으며, 청일전쟁 시기와 러일전쟁 때에도 압록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다. 

    

6.25 전쟁 때에는 압록강 연안 초산(楚山)에 돌입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오기도 했으며 중공군의 참가로 인해 미군이 북한에 대한 중공군의 지원을 끊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기도 했다. 통한의 역사가 언제나 압록강에서 끊이지를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 상징인 압록강 철교는 1905년 일본이 한반도에 경의선을 개통한 후 중국 쪽으로 철도를 연결할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1911년 10월에 단선 철교로 개통했다. 이 철교는 단동 방향 4번째 경간에 대형 선박 통과를 위한 회전식 개폐 장치를 갖춘 단선 철교로 개통되었는데 1943년 압록강 상류 쪽에 복선 철교(길이 943.3m)가 새로이 개통된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참전하자 미군은 폭격기를 동원, 압록강 철교를 폭파한다. 이때 나란히 있던 두 철교 모두 끊어진다. 그러나 1.4 후퇴 이후 중공군은 다리를 복구하는데 1943년에 개통한 복선 철교만 수리하고, 단선 철교는 부서진 채로 놔두었다.      


이 다리는 현재 북한 측을 조망할 수 있는 중국 측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나중에 새로 건설한 복선 철교는 1990년 북한과 중국이 합의하에 ‘압록강 철교’에서 ‘조중 우의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압록강 하류에서 고기잡이 하는 북한 주민들과 북한 주거지역  
압록강 철교, 오른쪽 끊어진 철교는 북한쪽에서 바라본 모습(출처: 위키백과)



5. 북한과 중국 간 국경조약     


흔히 <북중 국경 조약>이라 부르는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은 1962년 10월 12일 북한과 중국이 평양에서 체결한 국경 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은 그 후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양국이 의정서(조중 변계 의정서, 中朝边界议定书)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황해 영해(領海)의 국경선에 관한 내용 등을 명확히 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주은래가 양국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 1909년 9월 4일,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청나라와 일제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그 상류의 경계로 정하였다.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일제가 체결한 조약인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되었다. 이에 새로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 조중 변계조약이다.     


이 조약은 의정서까지 교환하고 발효가 되었음에도 북한과 중국 양측이 모두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그 구체적 내용은 1999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조약은 양국이 모두 그 체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는 ‘비밀’ 조약이므로 한반도 통일 과정이나 그 이후에 국경 분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위키백과/조중 변계조약)     


문제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32Km 지역의 경계선이 불분명하다. 이 문제는 두만강 상류에 위치한 백두산 근처의 경계와 관련되어 있다. 1909년 간도협약에서 국경선의 밑바탕이 형성됐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여러 물줄기 중 어느 것이 진짜 중심 물줄기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만주 벌판이 걸린 토문강과 두만강의 단어적 해석의 중국 측 억지주장을 어떻게 설득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의 영토 문제 때문에 토문강에 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은 중국대로 토문강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중국 측에서는 백두산 천지의 바로 위쪽에서 물줄기를 따져 일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사도백하와 오도백하를 명확히 하는 게 쉽지가 않다. 여기서 문제가 출발하고 있다. 어떻게 국경을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통한의 눈물을 야기하고 있다. 내 땅 내 나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니 말이다.          


봄날의 백두산



6. 호산장성과 박작성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압록강 하류 끝부분 신의주 건너편 중국의 단동 지역에 호산장성(虎山长城)이 있다.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호산"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장성 유적을 산책할 수 있도록 정비를 마친 상태이다. 

    

90년대부터 중국은 호산장성을 개축해 만리장성의 끝 지점인 것처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는 명나라의 장성이 아니라 고구려가 세운 박작성(泊灼城)으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의 연장인 것처럼 선전을 하고 있다.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를 제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만주가 옛날부터 중국의 지방정권 내지 영토임을 과시하기 위한 공작일 뿐이다.  

   

박작성은 중국 수와 당의 침략에 대비해 고구려가 천리장성의 일부로 세운 것이다. 단동 시내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20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은 1990년부터 성을 발굴하면서 석벽과 돌로 쌓은 우물, 목선과 같은 고구려 유물을 대거 발견한다. 하지만 고구려 유물들을 없애버리고 박작성 유적을 중국식 벽돌 성으로 개조하여 박작성의 자리에 호산장성이라고 표시해 놓고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대대적으로 우기는 중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성의 흔적은 산 정상의 작은 망루 유적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호산장성은 돌과 흙으로 쌓아 모양이 소박한 돌담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호산장성은 내화벽돌로 길이가 1.200m나 되는  웅장한 성벽과 봉화대를 설치해 옛 돌담의 복원이 아니라 명나라 산해관 장성을 본떠 만든 관광지일 뿐이다. 그 관광지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어나지만 언제쯤 우리의 박작성을 마음 편히 찾을 수 있을지 또다시 통한의 눈물이 흐른다.  

        

박작성 흔적을 지우고 호산산성을 축조했다.
단동시내의 모습들



7. 압록강변의 전설들     


1) 압록강가 중강진에 있는 도마봉 운림지에 얽힌 전설


압록강 연안에 위치한 중강진 부근에 도마 봉이 있다. 그 봉우리 부근에 연못이 있고 그 곁에 초가집 한 채가 있어 운림(雲林)이란 처사가 살았다. 그는 퉁소를 잘 불었다. 어느 해 팔월 보름날 밤 운림이 연못가 바위에 올라앉아 퉁소를 불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한 여인이 나타나 운림에게 다가온다. 하늘의 뜻이라 생각해, 둘은 부부가 되어 금실 좋게 살아갔다.      


그런데 이듬해 여름날이 가물기 시작해 한 달이 지나도록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론 운림도 가뭄을 근심했지만, 운림의 부인이 걱정하는 정도는 더 컸다. 가뭄이 깊어갈수록 부인의 얼굴빛은 점점 더 나빠졌고, 음식도 잘 먹지 못했으며 자꾸 울었다.      


이 때문에 운림은 더욱 간절히 비를 기다렸으나, 가뭄은 심해만 갔다. 연못의 물이 거의 다 말라붙고, 초목도 다 타서 며칠만 더 지나면 폐농할 판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자 부인은 아예 식사도 전폐하고 잠도 안 자며 조바심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림이 새벽에 일어나 보니, 부인이 없고 편지 한 장만 놓여 있었다. 자신은 연못 속에 살던 물고기였는데, 퉁소 소리가 너무도 아름다워 마음이 끌려 사람으로 변신해 함께 살았으며 자기 때문에 가뭄이 찾아와 다시 못 속으로 돌아가니,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이면 퉁소 소리나 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가뭄은 물러갔으나 운림은 슬픈 마음을 퉁소로 달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에서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연못 속으로 들어갔고 한다. 이후부터 이 연못을 운림지(雲林池)라 불렀는데, 달 밝은 밤이면 퉁소 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곡조가 연못에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가뭄이 심할 때, 못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하며, 또 이 못 속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많은데 물고기를 잡으면 벌을 받는다고 한다.     

(출처: 이홍기, 조선 전설집, 조선 출판사, 1944).     


2) 압록강의 수신


2010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한 『압록강 유역 전설집』에 압록강 수신(水神)과 관련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가 개벽한 후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을 각기 세 수신이 다스렸다. 어느 날, 두만강의 수신이 압록강, 송화강의 수신에게 청을 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평소 각별한 사이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자주 만나지 못했던 터라 세 수신은 십 여 일 간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압록강의 수신이 제 물길로 돌아와 보니, 물빛이 혼탁해져 깊은 물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압록강 수신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곳에서 삼두육비의 형상을 한 황해의 괴수가 흙탕물을 흩뜨리고 있었다. 압록강 수신이 삼두육비를 쫓으려 했지만, 삼두육비의 도술이 만만치 않아 며칠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이 소식을 접한 두만강, 송화강의 수신이 백두산의 물줄기 하나를 터 압록강으로 흐르게 했다.

     

이에 압록강 물빛이 깊은 속까지 훤히 비치게 되자, 삼두육비는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삼두육비는 다시 황해로 숨어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압록강의 물빛이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강과 하천에 수신, 또는 ‘용신’이라고도 하는 신이 살고 있다고 여겼다. 수신은 수원(水原)을 관장하는 것은 물론 청정한 물빛을 유지케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압록강 전설」은 전통적인 사고에 기인해 압록강 수신이 삼두육비의 침해를 물리침으로써 여느 강에 비해 더욱 푸른 물빛을 간직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 맑고 푸르른 압록강, 통한의 강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함석헌 선생이 말한 “압록강은 민족의 고소장”이라고 했던 의미를 넘어 민족의 한을 풀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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