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Sep 19. 2016

마지막 전쟁 라그나뢰크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아이슬란드  9


마지막 전쟁 ‘라그나뢰크’(Ragnarők)  



1.


오늘은 마지막 드라이빙을 하는 날이다. 서해안 스네펠스요쿨 빙하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출발해 오늘은 레이크야비크를 거쳐 공항 인근 마을 케플라빅(Keflavik)까지 간다. 서해안가를 따라 주행을 하기 때문에 도로 상태는 좋을 것이다. 더구나 멕시코만 난류의 영향으로 서쪽 해안가는 기온도 조금 높아 영상 5도 정도의 기온 상태를 보인다.


아이슬란드 숙소에는 대부분 지하수를 연결해 온천을 즐길 수 있도록 설치를 해 놓았다. 어젯밤 묵은 비크(Vik)라는 게스트하우스에도 베란다에 오크통으로 만든 욕조를 설치해 놓고 지하의 온천물을 연결해 놓아 추운 겨울날에도 마치 야외 온천을 하는 것처럼 온천욕을 즐길 수가 있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면서 대부분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온천욕을 매일 하다 보니 피로가 적었다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하늘도 맑은 편이라 아주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




남쪽으로 조금 가다가 1번 도로를 만나는 지점에서 북쪽 아퀴레이리 방향으로 거꾸로 조금만 가면 화산 폭발 흔적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을 만난다. 그라브록(Grabrok)이라는 곳인데 이곳 화산지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화산 폭발 후 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화산이 폭발해 이중화산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처음 화산이 폭발을 한 후 같은 장소에서 2차 폭발이 잇따라 발생한 드문 경우이다.


화산 인근 지역에는 화산 폭발 후 용암과 화산재로 인해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이류가 자라고, 또다시 이끼류가 자라고, 마지막으로 나무나 풀 같은 초본식물 등이 순차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자라는 게 너무 신기하다. 아마 자연은 그렇게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자연의 위대한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이슬란드의 자연환경을 보면서 자연스레 북유럽 신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거친 자연환경과 음산한 기후조건, 삭막한 자연과의 사투,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신화 속 이야기로 자리하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2.


북유럽 신화는 거창하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평범한 범부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특히 신화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거창하고 엄숙해야 할 것 같은 고정관념이 있는데 북유럽 신화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 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그만큼 북유럽 신화가 소위 ‘생활 밀착형 신화’라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딘과 말썽쟁이 로키가 인간 세계 미드가르드를 여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독수리가 나타나 로키를 괴롭힌다. 로키가 살려달라고 외치자 독수리는 아스가르드에 사는 신들에게 청춘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사과를 매일 하나씩 나누어주는 여신 이둔을 데려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로키는 이둔이 청춘 사과를 가꾸고 있는 정원으로 몰래 들어가 감언이설로 이둔을 속이고 독수리에게 데려간다. 독수리는 다름 아닌 거인족의 티아지였는데 이둔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이둔이 인간세계인 미드가르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독수리는 이둔을 데려가 자신의 집에 가둔다. 이둔이 사라진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녀가 매일 한알씩 제공하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신비의 사과를 받아먹지 못하게 되자 점차 늙어가기 시작한다. 이를 알게 된 오딘은 로키에게 이둔을 다시 데려오라고 명령을 한다. 거인 티아지가 사냥을 나간 사이 로키는 이둔을 몰래 다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Idun and the Apples”(James Doyle Penrose, 1890)



오딘은 거인 티아지가 다시 아스가르드로 올 것을 염려해 성 주변에 불을 놓는다. 독수리로 변신해 뒤쫓아온 티아지는 미처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죽는다. 불에 타 죽은 거인 티아지의 딸 스카디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자 복수를 하려고 아스가르드로 온다.


스카디는 사냥을 즐기던 터라 싸움에도 능했기에 창과 방패를 들고 아스가르드에 나타난 스카디를 본 신들이 또다시 싸움이 벌어질까 두려움에 떤다. 신들은 그녀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스카디는 내심 오딘의 둘째 아들 발데르가 맘에 있던 차에 남편감과 큰 웃음을 그녀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녀 요구대로 하되 얼굴은 보지 말고 발만 보고 신랑감을 고르라고 한다. 그녀가 내심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발도 잘생겼을 거라 믿고 발이 잘생긴 신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가 고른 발이 잘생긴 신은 늙은 바다의 신 뇨르드였다. 스키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조건을 고대하는데 이때 로키가 나서서 자신이 스카디를 웃기겠다고 한다.


로키는 자신의 성기에 끈을 묶고 다른 한쪽은 염소의 수염에 끈을 묶는다. 염소가 움직이면 로키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로키가 움직이면 염소가 수염 때문에 음매애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아스가르드는 오랜만에 웃음바다가 되고 만다. 결국 스카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사진 설명> 레이크야비크에 있는 섹스박물관에서 관련 이야기와 바위로 만든 설치작품을 볼수 있다.   



스카디는 결국 신들과 화해를 하고 뇨르드와 결혼을 한다. 오딘은 거인 티아지의 눈을 하늘로 던져 두 개의 빛나는 별로 만들어 준다. 후에 스카디는 사냥꾼들의 수호신이 되는데 스칸디나비아라는 명칭은 바로 스카디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가 이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조금은 뜻밖이라고 할수 있다. 어찌 보면 신들의 이야기치고는 평범한 인간들 이야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북유럽 신화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신이란 존재가 인간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영원불멸이 아니라 인간처럼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란 걸 알게 된다.


또한 신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극히 정상적이라 하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오딘을 보면 그는 지혜의 샘에서 지혜를 얻는 대가로 한쪽 눈을 내주었기에 애꾸가 된다. 또한 지혜를 상징하는 미미르라는 현자는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다. 티르 역시 오른손이 없는데 늑대 거인에게 그의 한쪽 팔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외모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춥고 음산한 지형적 특색을 반영한 듯 언제나 비장한 모습으로, 죽음이라는 종착점으로 향해가는 비운의 주인공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가장 강력한 존재인 발할라의 주인장 오딘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예언을 듣고 그것을 막으려 애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세상의 마지막 전투를 의미하는 라그나로크 전쟁으로 인해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끝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토르도 막강한 묠니르 망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거대한 뱀에게 물려 죽는다. 결국 이 전쟁으로 신들과 거인, 괴물 등 모두 죽고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된다.


아이슬란드를 보면 볼수록 북유럽 신화, 즉 아이슬란드의 사가(Saga)는 어쩌면 모두가 불과 화산으로 인한 아이슬란드 특유의 험악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반영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다.


Battle of the Doomed Gods(Friedrich Wilhelm Heine, 1882)


오딘과 펜리르, 프레이르와 수르트루의 전투 장면(Emil Doepler, 1905)


토르외 사투를 벌이는 거대한 뱀(Emil Doepler, 1905)


수르트루가 내뿜은 불꽃으로 아스가르드가 몽땅 타버리는 중(라그나뢰크의 마지막 장면)(Emil Doepler, 1905)



3.


북유럽 신화에서 ‘마지막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라그나뢰크’가 시작되면 온 세상은 엄청난 겨울이 다가오고, 인간들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 폭력만 난무하는 세상으로 변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면 늑대가 태양을 삼키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재지변이 나타나고 악마의 앞잡이들이 서서히 결집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결전장인 비그리드 벌판으로 총집결해 사가의 주인공들인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오딘과 천둥의 신인 토르를 비롯한 아스가르드 신들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된다. 비그리드 벌판의 최후 결전은 수르트루가 쏜 불꽃이 지상을 완전히 뒤덮고 불태우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했다. 마치 폼페이 최후의 날처럼 아이슬란드 비그리드 벌판도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문득 먼 산을 바라보다 화산 폭발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얀 산봉우리가 마치  수르트루가 쏜 불꽃처럼 붉은 연기를 쏟아내는 화산처럼 느껴진다. 저어기 어디께쯤이 바로 비그리드 벌판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는 건 어쩌면 바로 화산 폭발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에는 여전히 100여 개의 화산이 폭발 일보직전에 있다. 지난 2010년에도 아이슬란드 남동쪽에 있는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당시 11Km까지 하늘로 솟구친 화산재가 바람을 타고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가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아이슬란드가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해마다 1-2cm 정도씩 벌어지면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특히 지금도 레이크야비크 수도 인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우르다르붕카 화산이 서서히 폭발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지난해 8월에는 적색경보까지 내리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기까지 했다.


현재 아이슬란드 중앙 지역에서 지질조사를 벌이고 있는 지질학자들의 견해는 해마다 1-2cm씩 솟아오르던 땅이 최근 10여 년 사이에 2-3cm 정도로 급격히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또다시 화산 폭발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4.


아이슬란드를 빙둘러 달리면서 보았던 풍광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모두가 순간처럼 지나간다. 찬란한 오로라의 초록빛과 붉은 주단 같은 저녁노을, 그리고 하얀 눈밭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아이슬란드 수호신에게 간구했던 기억까지, 이제는 추억 저편에 고이 접어 두어야 할 것 같다. 내일은 아이슬란드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레이크야비크로 되돌아왔다. 할그림스 교회에 들러 다시 한번 레이크야비크 도시를 바라본다. 10여 일간 아이슬란드를 정복한 소회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카페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고 또다시 최종 목적지인 공항 근처에 있는 숙소로 향한다.


 

<사진 설명> 숙소에 도착해 거실 선반 위에 놓인 글귀를 보는 순간 이번 여행의 의미가 바로 저기 적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 설명> 숙소 근처에서 바라본 레이크야비크 방향,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아이슬란드 화산을 은근히 (?) 고대하면서 이번 여행의 의미를 정리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슬란드의 수호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