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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Oct 14. 2016

룩셈부르크를 가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룩셈부르크  1


1.


기차가 서서히 룩셈부르크에 다가간다. 저 멀리 룩셈부르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뾰족한 교회의 첨탑과 디즈니랜드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건물들이 삐죽이 보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나타난다. 그리고 금방 그 스카이라인은 사라지고 기차가 지나는 곁으로 마치 지하도시 같은 느낌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철길 아래 동네에 숲과 집들이 들어차 있어 다른 지역 도시와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는 걸 느끼는 순간 기차는 어느새 룩셈부르크 역에 도착한다.


룩셈부르크 역은 그리 크지 않지만 아담한 공간이 꽤나 정갈한 인상을 준다. 문득 입구 쪽에 걸린 어느 작가의 사진전 펼침막이 눈에 들어온다. 룩셈부르크 출신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가족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래전 인물이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한 주제임에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친다. 인간가족전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한데 룩셈부르크에 머무는 날들이 주말이라 전시회를 볼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아쉽기 그지없지만 인터넷으로 그의 사진전을 대신한다.


에드워드 슈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은 2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화가이면서도 사진가의 길을 걸어왔다. 흑백과 컬러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스타이켄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76세 되던 1955년 『인간가족전 The Family of Man』을 기획, 전시하고부터이다.


Edward Steigen(1879~1973)



『인간가족전』은 2년 정도에 걸친 준비과정에서 전 세계의 남녀, 아마추어, 프로, 유명 사진가, 무명 사진가를 막론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평가하여 200만 장의 사진을 모으고, 그중 1만 장을 프린트해 최종적으로 503장을 선정한다. 이는 68개국의 사진가 273명의 작품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 생활공간과 각기 다른 생활환경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모든 인류는 근본적으로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전은 1955년 1월 26일부터 5월 8일까지 4개월에 걸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인간이 태어나 교육을 받고 결혼하고 살다가 늙어서 죽는 과정을 「인간가족전」이란 주제 하에 진행한 것이다. 그 후 「인간가족전」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가 되었고, 뉴욕뿐 아니라 세계 85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회를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물론 한국도 1957년 경복궁 미술관에서 그의 인간가족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설명> 우측: 아돌프 다리 바로 앞에 있는 건물, 이 건물은 현재 은행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


룩셈부르크, 나라 이름과 수도의 이름이 같다. 룩셈부르크 시는 강으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300여 m의 절벽을 이루는 사암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천연의 요새처럼 성채도시로 발전하면서 천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시 중심부에 위치한 유럽 최고의 발코니라고 불리는 곳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절벽 아래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가지의 정경을 보게 된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라고 불리는 곳. 바로 쉬맹 드 라 코르니쉬(Chemin de la Corniche)이다. 일명 ‘헌법광장’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이다. 발아래 계곡이 있고 그곳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나무 사이로 오래된 주택들이 보인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긴 다리도 장관이다.


이 다리 이름은 ‘아돌프 다리’(Pont Adolphe),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페이트루세 강 바로 위에 설치했다. 그래서 이 다리는 룩셈부르크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는 신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 46m, 길이 84m인 이 다리 중간에 서서 룩셈부르크를 내려다보노라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다리 아래로 작은 사잇길이 나있는 게 보이기 때문인데, 그곳으로 내려가 걷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아돌프 다리’(Pont Adolphe)



다리 아래쪽은 그룬드(Grund)라고 부르는 계곡마을이다. 룩셈부르크 주민들이 주거지역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특히 계곡 마을 북쪽 절벽 지역을 보크(Bock) 지역이라고 부르는데 절벽에는 많은 동굴을 뚫어 요새처럼 만들었다. 이 절벽 안쪽에는 23Km에 달하는 인공터널을 파놓기도 했는데 2차 세계대전 때는 룩셈부르크 시민들이 이곳에서 폭격을 피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18세기경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구축했는데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반면에 계곡 위쪽은 교회와 사무실 등 주로 사무공간이 차지하고 있다.


가만가만 룩셈부르크를 걷다 보면 도시는 생각보다 작지만 부드럽게 펼쳐진 들판과 숲이 우거져 있고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가파른 계곡 등이 기대 이상의 매력을 제공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요새 도시답게 룩셈부르크 시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도시에 수없이 많은 성채 유적들이 널려있고, 특히 룩셈부르크의 조상인 신비로운 신화 속 주인공 물의 요정 멜루지나의 아름다운 감성을 느끼고 만날 수 있으니 정말 매력적인 도시라고 밖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사진 설명> 룩셈부르크 중앙역 외부와 내부 모습, 아래는 신시가지 모습

 


3.


룩셈부르크 시는 963년 아르덴 출신의 지크프리드 반 룩셈부르크 백작이 트리어 지역에 있는 성 막시민(St. Maximin) 사원과 교체하려고 보크(Bock) 바위산을 사들인다. 그리고 이곳에 성을 지으면서 주민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독일 황제를 4명이나 매출한 명문 귀족 집안이다. 도시가 사암지역에 세워져 난공불락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북쪽의 지브롤터’라 불릴 만큼 막강한 요새도시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이 요새 도시는 1477년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정복을 당하는데, 이 시기부터 1867년 런던조약으로 프로이센 군이 철수를 하고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1839년 룩셈부르크는 독립을 한다.


<사진 설명> 왼편: 무명용사 충혼탑,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죽은 이들까지 포함해 무명용사들의 혼을 추모하는 탑, 오른편: 룩셈부르크를 위해 싸운 전쟁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 Golden Lady, 월계관을 든 충혼탑 위의 여인상

빌렘 3세



그러나 룩셈부르크 공국의 후계자가 대가 끊어져 네덜란드 국왕 빌렘 3세가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임하고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연합국이 된다. 그 후 네덜란드의 빌렘 3세가 죽자 룩셈부르크 출신의 아돌프 대공이 취임하면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연합국’은 해체되고 현재의 입헌군주국가인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시작된다.


1715년 오스트리아군이 이 지역을 관할하던 당시, 보크 지역의 요새 확충과 보완작업을 한다. 보를 이용한 공법을 도입해 룩셈부르크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방어의 중요 요충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이 공사는 4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도시 주위에 팅엔(Thtigen)과 올리시(Olisy) 같은 새 요새의 건설과 지하 터널로 연결된 포대 등을 마련한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 시는 이때부터 바위 속 깊은 곳에 수많은 요새 통로들이 마치 두더지 집처럼 여러 층을 이루며 뻗어나가고, 각 칸에는 여러 대의 대포와 기타 화기들을 설치할 수 있어 방어용 요새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현재는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코스로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을 뿐이다.


<사진 설명> 룩셈부르크 발코니/ 골든레이디가 있는 곳이 헌법 광장이다. 그 앞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4.


룩셈부르크는 베네룩스 3국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작은 나라의 국력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룩셈부르크 시는 주변을 감싸고 알제트 강이 흐르고 도시를 관통해 피이투루스강이 흐르고 있다. 룩셈부르크를 거쳐 남쪽으로 흐르는 알제트 강은 독일 쪽 모젤강과 합류를 하는데 이 곳에서 신의 물방울이라는 찬사를 받은 맛있는 모젤 백포도주가 생산된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 과정에는 은행들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인구 55만 명의 소국임에도 금융산업을 앞세워 부를 키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 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1만 573달러로 세계 1위였다. 조세피난처 역할로 부를 키웠다는 지적도 있지만 룩셈부르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런던·뉴욕·프랑크푸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융허브로 인정받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대공이 이끄는 작은 나라이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 내 경제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843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과 관세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에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간에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 석탄 철강공동체(ECSC), 1958년 유럽 경제공동체(EEC) 등에 가맹함으로써 작은 나라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또한 FTA 시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베네룩스 동맹을 통해 네덜란드, 벨기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들 세나라,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 공국을 합쳐 베네룩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앙리 대공이 2000년 10월 즉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으며, 자비에르 베텔 총리가 2013년부터 전임 융커 총리 후임으로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고 있는 입헌군주제 나라이다.


한편, 룩셈부르크는 주민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여전히 룩셈부르크 사회의 중심가치를 이루고 있으며, 유럽연합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국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1월부터 룩셈부르크는 뜻밖에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에 따라 룩셈부르크에서는 지난해 5월, 룩셈부르크 첫 동성 부부가 출현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현 룩셈부르크 총리인 자비에르 베텔이다. 그는 벨기에 건축가 고티에르 데스테네이와 결혼식을 올린다. 사비에르 베텔 총리는 이미 지난 2011년 수도 룩셈부르크 시장으로 취임한 직후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했고, "한 번뿐인 인생이라 숨기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가장 보수적인 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 총리를 맡은 나라, 물의 요정 멜루지나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동화의 나라 룩셈부르크, 사람들이 룩(look), 룩(look), 룩셈부르크(Luxemburg)를 외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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