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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29. 2016

신화를 그리는 남자, 루벤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8


1.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 헤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한자리에 모여 누가 제일 아름다운지를 겨루고 있다. 심판은 양치기 목동 파리스(Paris)이다. 그 옆에서 헤르메스가 거들고 있다. 우승자에게는 황금사과를 수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이라 부른다. 


세 여신은 각각 파리스에게 자신을 승자로 뽑아주는 대가로 다음의 조건들을 내건다. 헤라는 부귀영화와 권세를,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파리스는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아프로디테를 뽑는다. 그러나 이 선택은 결국 불행을 야기하는데, 황금 사과의 저주는 훗날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파리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화면 맨 오른쪽에 있는 남녀는 파리스의 아내 오이노네와 그녀의 아버지이자 강의 신 오이네우스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약속에 따라 아름다운 헬레네를 차지하지만 훗날 그녀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일으킨 트로이 전쟁에서 독화살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파리스의 아내 오이노네는 파리스에게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 파리스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파리스의 심판’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에 나오는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인데, 서양 미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신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루벤스도 이 주제를 가지고 몇 작품을 그린다.(표지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이다.) 주제 자체가 주는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의미도 강하지만 문득 루벤스가 신화 속 미인들의 미모와 자신의 부인들과 은근히 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파리스의 심판,  1639년경, 패널에 유채, 199x379cm, 프라도 미술관



2.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집안은 원래 로마 가톨릭교도였는데 그의 아버지 얀 루벤스가 칼뱅교도로 개종을 한다. 그 후 얀 루벤스는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가톨릭 수호자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박해를 피해 안트베르펜을 떠나 독일로 도망을 간다. 그 후 얀 루벤스는 신교도인 작센의 안나 공주(1577년 사망)의 외교사절이자 고문관이 된다. 


안나 공주는 스페인의 네덜란드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고 있던 자유주의적 가톨릭교도인 오라니에공(네덜란드 현 왕가 시조인 오렌지공) 빌렘 1세의 두 번째 아내였다. 그런데 안나 공주가 임신하는 바람에 안나와 루벤스 아버지 얀 사이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고 만다.(사랑이 뭐길래 겁도 없이) 이로 인해 얀 루벤스 가족은 또다시 독일 베스트팔렌에 있는 지겐으로 추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다. 


지겐에서 루벤스가 태어난다. 얼마 후 얀 루벤스는 지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독일 쾰른 시로 이사를 한다. 그러나 1587년 얀 루벤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되자 루벤스 어머니는 네 자녀를 데리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다. 그 후 루벤스는 친척인 화가 토비아스 베르하크트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아담 반 노르트의 도제로 지내다 오토 반 벤의 도제가 된다. 반 벤은 당시 로마에서 고대 미술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공부한 대단한 실력자였다. 루벤스는 21살이 되던 1598년 안트베르펜 화가 조합에 등록을 하고 23세가 되던 해인 1600년에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고대 미술과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며 지낸다. 그러나 1608년 10월 루벤스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루벤스가 도착하기 전 세상을 떠난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 정착해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된다. 그리고 루벤스는 그해 10월 안트베르펜 법률가의 딸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을 한다. 루벤스는 “선량하고 정숙한 여인”이라고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을 정도로 그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Rubens and Isabella Brandt, 인동덩쿨, 1609. Oil on canvas, 178 cm × 136.5 cm, Alte Pinakothek(뮌헨)



루벤스는 이사벨라와의 결혼생활을 작품으로 남긴다. 부부가 다정하게 인동덩굴 아래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앉아 있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부부를 그린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인동덩굴과 정원은 모두 전통적으로 사랑의 상징이다. 또한 오른손을 마주 잡고 있는 것도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한편 루벤스가 왼손으로 검을 잡고 있는 것은 귀족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루벤스는 이미 안트베르펜에서 성공한 화가로서 상당한 돈을 벌어 대저택을 마련할 정도였다.


그런데 1626년 그렇게 다정하고 현명한 아내였던 이사벨라는 루벤스가 유럽의 최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시기에 그만 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난다. 더구나 그녀는 장녀인 클라라 세레나가 먼저 죽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하직한다. 루벤스는 그녀의 죽음 앞에서 상실감에 빠지고 만다. 루벤스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외교 업무에 전념한다. 


맨 왼쪽: 이사벨라의 장녀 클라라 세레나(5살 때), 이 아이는 12살에 요절을 한다.

가운데: 이사벨라의 둘째 아들 니콜라스 

맨 오른쪽: 큰 아들 알버트와 작은 아들 니콜라스



때마침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로마 가톨릭 수호를 위해 헨리 8세 지배하의 영국을 침공하려고 프랑스와 밀약을 맺는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을 로마 교황이 승인하지 않는다며 개신교로 돌아서 버린 인물이다. 1628년 루벤스는 전쟁 분위기 타개를 위해 비밀리에 마드리드로 달려간다. 루벤스는 마드리드에 9개월 동안 머물면서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영국과 싸우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기를 간청한다. 결국 펠리페 4세는 루벤스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루벤스를 스페인령 네덜란드 추밀원장으로 임명하여 특별한 평화사절의 임무를 띠고 영국에 갈 수 있게 해 준다. 


드디어 루벤스의 노력으로 1630년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조약을 맺는다. 루벤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뿐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아 유럽 각국을 오가며 여러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 결과 1629년 스페인 펠리페 4세로부터, 그리고 1630년 영국의 촬스 1세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는다.


Portrait of Helena Fourment, 1630, Musees Royaux des Beaux-Arts(브뤼셀)



이사벨라를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던 루벤스는 그사이 평범한 가정 출신의 푸르망을 만나 재혼을 한다. 1630년 당시 53세였던 루벤스는 막내딸 같은 16살의 헬레나 푸르망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루벤스는 자신에게 헌신하고 가정을 잘 지켜나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귀족 가문의 여인보다 헬레나 푸르망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루벤스가 죽기까지 10년을 함께 살면서 5명의 아이를 낳는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화목한 결혼생활을 한다. 루벤스가 푸르망을 사랑한 또 다른 증거를 볼 수 있다. 루벤스의 막내아들, 즉 헬레나 푸르망이 낳은 다섯 번째 아이는 루벤스가 죽은 지 8개월이 지나서야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가 말년에 그린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대부분이 그의 아내 푸르망을 모델로 한 것들이다. 특히 루벤스는 그녀를 비너스와 헤라, 그리고 아테네 등 대부분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의 여주인공들처럼 등장시킨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삼미신(1638)이다. 


The three Graces, 1639, 221x181cm, Museo del Prado(마드리드)



삼미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명의 미의 여신을 말하는데, 세명의 여신은 아글라리아(Aglia), 유프로시네(Euphrosine), 그리고 탈리아(Thalia)이다. 이들은 서로 포옹하면서 자비의 순환과정을 보여준다. 벌거벗은 세 여신들은 나뭇가지에 옷을 벗어 걸어놓고 서로 손과 팔을 잡고 있다. 뒷모습의 여신은 사랑을, 앞을 보고 있는 여신은 아름다움을, 그리고 옆을 보고 있는 여신은 쾌락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루벤스가 죽기 얼마 전 완성했는데 여신들의 풍만한 몸매를 통해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줄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그림은 그가 죽을 때까지 세상에 공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그림에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와 두 번째 부인 푸르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왼쪽 여인이 그의 두 번째 부인 헬레네 푸르망이고 오른쪽 여인이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정말 루벤스의 삼미신에 등장하는 여인들 몸매를 보고 아름답다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이 의문에 대해 서양미술사를 집필한 곰브리치가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뚱뚱한 여인들’을 보고 못마땅해하겠지만 당시의 플랑드르에서는 날씬한 몸매가 유행이 아니었고... 그 점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활기차고 떠 뜰썩하게 삶을 즐기는 그의 태도가 루벤스를 단순한 기예가로 만들지 않고 대가 그 이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의 인생에 대한 환희야 말로 그의 작품을 화려한 바로크풍의 단순한 실내 장식으로 타락시키지 않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걸작품으로 남아있게 만든 것이다.”(* 출처: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pp.403~405) 


루벤스가 보여주는 과장의 미학은 바로 지난 세기 유행처럼 번졌던 르네상스 미술의 사실적 인간미보다는 성서와 신화를 바탕으로 한 해박한 인문학적인 분위기의 작품들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풍만하고 과장된 몸짓과 표정 등은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더욱 성서적이고 신화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리라.


아무튼 루벤스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자신의 부인들을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루벤스의 누드화는 뚜렷한 선으로 묘사하기보다 명암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루벤스가 죽자 스페인 펠리페 4세가 구입해 스페인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삼미신뿐 아니라 말년에 그린 작품들에는 그의 두 번째 아내 푸르망이 자주 등장한다. 루벤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로부터 마드리드 근처의 왕궁 토레 데 라 파라다(천국의 땅)를 장식할 그림 60점을 주문받는데 이 그림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대부분 푸르망을 모델로 한 것이다. 


1636년부터 시작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아쉽게도 루벤스가 그림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40개의 작품만을 완성하는데, 팔의 통풍이 심해지면서 심장으로 번져 1640년 안트베르펜에서 죽음을 맞는다.(* 40개의 작품들은 모두 프라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The Birth of the Milky Way, 1636-1637, Museo del Prado(마드리드)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미케네의 왕 엘렉트리온의 딸 알크메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에 참가하여 집을 비운 틈을 타 제우스는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알크메네를 속이고 동침을 한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나기 직전 제우스는 신들에게 ‘오늘 처음 태어나는 페르세우스의 자손이 그리스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자 남편 제우스가 다른 여자와 동침해 낳은 아이가 후계자가 된다는 말에 화가 난 헤라가 수태한 지 7개월밖에 안된 에우리스테우스를 먼저 태어나게 해 헤라클레스가 그를 섬기도록 한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난 후 제우스는 그에게 불사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잠이 든 헤라의 젖을 몰래 물린다. 아이가 젖을 빠는 힘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헤라가 아기를 뿌리치자 먹던 젖이 흘러나와 그 젖이 은하수(Milky Way)가 되었다고 한다.(신화는 역시 뻥이야!)


그런데 이 그림 속 헤라는 바로 루벤스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은 루벤스가 펠리페 4세의 주문을 받아 마드리드 인근의 왕궁 토레 데 라 파라다(Torre de la Parada/ 천국의 땅)에 그린 40개의 작품 중 하나이다.


1630년 푸르망과 결혼을 한 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10년간 루벤스는 아이들과 특히 푸르망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긴다. 다음의 그림들은 모두 그 당시의 그림들이다.


왼쪽: 웨딩드레스를 입은 푸르망, 1630, Alte Pinakothek(뮌헨)

오른쪽: 푸르망이 낳은 첫째 딸 클라라 요한나와 아들 프린스(1637), 그런데 루벤스는 끝내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아들과 딸 사이에 흐릿한 형체의 손이 보인다. 누구를 그리려 했던 것일까?



왼쪽: Rubens와 Fourment, 그리고 아들 Peter Paul, 1639, Metropolitan Museum of Art(뉴욕) 

오른쪽: Portrait of Hélène Fourment, 1638, Kunsthistorisches Museum(비인)



Helena Fourment with a Carriage, 1639 Louvre(파리)



루벤스의 작품들을 보면서 문득, “나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은 바로 루벤스”라고 했던 렘브란트의 말이 떠오른다. 그럴 만도 했겠다. 성서와 신화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루벤스, 그뿐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내 루벤스이기에 그의 화폭에서 느끼는 종교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따스함을 전해주는 루벤스를 넘어선다는 것은 아무리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라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아래 그림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비인에 있는 예술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루벤스의 그림들이다.(예술사박물관은 카메라 후레쉬만 안쓰면 촬영이 가능하다. 노출이 부적절하지만 성의를 봐서 감상해 주시기를...^^)


-제목은 편의상 영문으로 작성했으며, 가능한 연도별로 정리했으니 시기별로 그림 주제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느낄수 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리스신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특히 루벤스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자신의 초상화 작품은 긴여정을 달려온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는듯한 느낌이 강하게 풍겨져 안쓰러운 느낌마저 든다.


루벤스 초상화 1638/40
The Feast of Venus, 1636/37
The Meeting at Nordlingen, 1635
The Holy Family Beneath an Apple Tree, 1630/32
The Triptych of St.Ildefonso, 1630/32
The Miracles of St.Francis Xavier, 1617/18
The Four Rivers of Paradise, 1615
The Infant Christ with John the Baptist and two Angels, 1615/20
Penitent St.Magdalen and her Sister Martha, 1620
Cimon and Iphigenia, 1617
The Miracles of St.Ignatius of Loyola, 1617/18
Jupiter and Mercury with Philemon and Baucis, 1620/22
The Calydonian Boar Hunt, 1617/28(?)
Ansegisel and St.Begga, 1612/15
Isalbella d’Este, 1600/1601


* 아래 사진은 안트베르펜에 있는 <루벤스 하우스>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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