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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09. 2016

플랑드르의 화가들(1)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0


1. 화가들의 도시 안트베르펜


15세기는 미술사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인데 이탈리아에서 다른 유럽지역들과 차별화된 미술 발전을 이룩해 나간다. 특히 원근법과 해부학의 발전은 미술의 발전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게 된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의 경우 얀 반 에이크 형제의 혁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생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알프스 남쪽과 북쪽의 차이는 마치 근대와 중세 마술가들처럼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한다.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관습에 짓눌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5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플랑드르 지역은 항만도시인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1477년 지금의 벨기에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자였던 마리 공주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을 하면서 플랑드르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된다. 그 후 1556년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왕위와 함께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영지를 물려주면서 플랑드르 지역은 또다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은 조만간 네덜란드가 1568년 스페인에 반기를 들면서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80년 전쟁을 시작하면서 더욱 갈등 양상을 띠게 된다. 신교도가 대부분이던 지금의 네덜란드 지역과는 달리 플랑드르 지역은 구교도가 대부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579년 지금의 네덜란드 남쪽 플랑드르 지역과 지금의 벨기에 중북부 브라반트 지역이 공식적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지금의 벨기에 남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 지역이 스페인군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자 결국 네덜란드는 분할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역을 제외한 지역들이 지리적으로 남쪽에 위치했던 탓에 플랑드르 지역과 왈롱 지역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 지역)로 자리를 잡는다. 


지금의 플랑드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네덜란드 전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비싼 값에 그림을 팔 수 있는 도시로서 안트베르펜은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화가들이 안트베르펜으로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플랑드르 지역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작품을 스페인의 마드리드나 오스트리아 비인에 있는 박물관이 적지 않게 소장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 역시 부자들, 즉 당시 플랑드르 지역을 지배하던 귀족이나 부자들이 대부분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들로서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품을 구입해 자기들 나라로 가져갔다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아무튼 브뤼셀 왕립박물관 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비인의 예술사 박물관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을 더 많이 볼 수 있으니 플랑드르 작가들의 작품을 보려고 한다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플랑드르 지역’은 지금의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의 남쪽 저지대 지방을 의미한다. 그래서 ‘네덜란드’라는 단어는 편의상 여기서는 현재의 네덜란드 국가명으로 사용하도록 하는데 루벤스가 활동하던 17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는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쳐서 네덜란드라고 불렀다는 것도 기억을 하면 좋겠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네덜란드가 독립을 하면서부터는 홀란드(Holland)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네덜란드 중부지역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이 지역이 중심이 되어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리면서 지금의 네덜란드 독립의 기반이 되었기에 현재는 지금의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국가명으로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는 플랑드르의 화가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오스트리아 비인에 있는 예술사 박물관과 스페인의 프라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2. 플랑드르의 화가들


플랑드르 지역 출신 화가들 모두를 소개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능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을 한 화가들 중에서 주요 위치를 점하고 있는 화가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한다. 


당시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 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있는 화가는 당연히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와 루벤스(Peter Paul Rubens), 그리고 그의 수제자 안톤 반 다이크(Jan van Dyck), 이와 함께 당시 네덜란드 화단에 새로운 화풍을 불러일으킨 페테르 브뤼헬(Pieter Brueghel de Oude),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홀란드(네덜란드 중부지역)에서 활약하던 프란스 할스(Frans Hals)와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Lembrand)가 당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일 것이다. 홀란드 출신 화가들 중 일부도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과 비교를 위해 소개를 할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 같은 거장은 네덜란드 편에서 따로 다루도록 한다.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그들 작품의 기술적인 특성이나 전문적인 미술사적인 이야기는 가능한 배제하고 작품 자체를 중심으로 소개를 하도록 한다. 이 글의 목적이 여행을 하면서 단순히 개인적 취미로 그림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얻으려는 필자와 같은 비전문가들을 위한 간략한 길잡이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네덜란드의 사람들과 지명 등은 우리말로 쓸 때 편의상 영어식으로 표기하도록 하되 결정적인 단어는 네덜란드식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1) 15, 16 세기의 화가들


(1)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얀 반 에이크(1390년경~1441년)는 플랑드르(저지대)의 브레다(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지역에 있는 도시로 반 고흐 고향과 가깝다. 또한 페데르 브뤼헬의 고향이기도 하다.)라는 도시 출신으로 근대 초상화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얀 반 에이크는 기름을 섞은 물감을 개발해 지금의 유화물감 방식을 정착시킨다. 그의 노력 덕분에 네덜란드 미술은 기틀을 잡게 되고 발전을 할 수 있게 된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앞의 글 ‘파랑새의 고향 헨트’를 참조할 것.) 


Virgin and Child with Canon van der Paele, c. 1434–1436. Groeninge museum, Bruges.

왼쪽: Jan van Eyck(National Gallery, London), 오른쪽: Margaret van Eyck(Groeninge Museum,  Bruge)

Johanni van Eyck(형)와 Jan van Eyck(동생) 동상, 헨트 바프광장에 소재, 2007년 10월20일 설치



(2) 한스 멤링(Hans Memling)


한스 멤링(1430-1494)은 프랑크푸르트 인근 셀리겐슈타트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얀 반 에이크의 화풍을 이어받아 그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많은 제단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초상화와 성화들이었다.


멤링은 1465년 경에 브뤼헤로 들어와 이곳에 정착해 그림을 그린다. 그사이 멤링의 명성은 플랑드르에 국한하지 않고 이탈리아에 까지 알려지게 된다. 그 이유는 멤링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법이 독창적인 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특히 상단과 하단, 그리고 전경과 배경 사이의 균형 잡힌 대위법이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로 브뤼헤에서 활동하던 멤링은 벨기에로 귀화를 하고, 거의 브뤼헤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하다 브뤼헤에서 생을 마감한다.(* 앞의 글 ‘브뤼헤의 종소리’에서 이미 한스 멤링의 수유하는 그림들 몇 점을 소개하였으니 그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St. John Miniature Altar, 1485/90
3단 제단화, 1485/90
St. Dominique 성모와 아기예수 1488/90
성모와 아기예수, 1485/1490 

왼쪽: 천사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1480.   오른쪽: 아담과 이브, 1485/90

2014-2015에 훼손된 수유하는 그림을 수정한 작품, Brugge 1494




(3) 요스 반 클레브(Joos van Cleve)


요스 반 클레브(1485-1540/41)는 1511년부터 1540년 사이에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화가로서 당대의 르멘상스 스타일의 화풍에 영향을 받고 이를 전통적인 네덜란드 화풍에 접목시킨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안트베르펜의 세인트 루크 길드(St. Luke Guild) 조합의 일원이었으며 고관대작들의 주문을 받아 그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Flügelaltar, 1530
Queen Eleanor of France, 1530
Kaiser Maximillian I, 1508-9
St. Jerome in his Study,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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