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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0. 2016

플랑드르의 화가들(2)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0


(4) 페테르 브뤼헬(Pieter Brueghel de Oude)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화가 번창했기에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다른 나라의 화가들보다 먼저 발견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화나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개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유형들을 모두 회화의 주제로 다루고 있었다. 그 예로 얀 반 에이크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묘사하는데 완벽한 대가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화가들은 일상생활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는 바로 피테르 브뤼헬이었다. 브뤼헬((1525/1530-1569)은 안트베르펜을 무대로 활동을 한 화가이다. 그가 정확히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는 불확실한데 그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라고 할 수 있는 브뤼헬이 자신이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의 원래 성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브뤼헬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네덜란드 최남단 브레다라는 도시 인근에 있는 ‘브뤼헬’(Breugel)이라는 마을이다. 바로 이 마을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삼은 것이다.


브뤼헬은 당시 미술발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다. 북해의 침침하던 분위기 속에 거주하던 브뤼헬이 알프스를 목격하게 되고 파리의 화려함과 대도시의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약동하는 사회의 의미를 점점 비중 있는 주제로 느끼게 된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는다. 이제 그의 그림은 단순히 교회를 위한 성서화뿐 아니라 사회상을 반영하는 그림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더구나 이 시기는 네덜란드를 지배하는 스페인의 알바 공작이 플랑드르의 총독으로 부임해 온 때였다. 


Landscape with the Fall of Ikarus, 1588, Royal Museum of Fine Art(Brussels)

왼쪽: The Fall of the Rebel Angels, 1562, Royal Museum of Fine Art(Brussels)

오른쪽: The Census at Bethlehem, 1588, Royal Museum of Fine Art(Brussels)



안트베르펜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브레다는 브뤼헬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끌던 빌렘 1세가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초기에 이곳에 진을 치고 전쟁을 하던 네덜란드 독립군의 전초기지였다. 따라서 브뤼헬이 당시 스페인과의 갈등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시에 네덜란드 미술가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뤼헬의 직품들은 바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작품은 동판화 1점을 포함하여 모두 45점이 알려져 있다. 특히 ‘바벨탑’, ‘농부의 혼인’, ‘눈 속의 사냥꾼’, ‘네덜란드의 속담‘, ’어린이 놀이‘ 등은 모두 유명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상당히 토속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의 속담'이라는 그림은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당시 플랑드르 지역의 여러 형태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왼쪽: Children's Games, 1560          오른쪽: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1559


Netherlandish Proverbs, 1559,   Frans Hals Museum, Haarlem

<그림 설명> 브뤼헬은 네덜란드의 속담을 통해 당시 네덜란드 서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중앙 약간 우측 위쪽에는 엉엉이를 까고  응아를 하는 사람들도 둘이나 보인다. 또 그 근처에서 토하고 있는 사람도 보이고... 별의 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 그림에는 동물들도 엄청나게 많은 수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 특징 중 하나는 한 화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자연히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게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인 풍속도라는 표현도 어울릴 법하다. 그뿐 아니라 브뤼헬의 작품은 당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네널란드의 독립을 은근히 강조하고 부추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벨탑’ 같은 작품은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가 바벨탑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비아냥대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플랑드르의 중심도시 안트베르펜에 종교화와 함께 브뤼헬처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개신교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자 종교화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따라서 브뤼헬의 작품들은 '성서의 장면’들과 ‘이카루스 추락의 풍경’과 같이 신화를 다룬 작품을 통해서, 또한 ‘네덜란드의 속담’에서와 같이 당시 민중들의 사회상을 보여주면서 네덜란드 화단에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다. 


왼쪽: The Tower of Babel, 1563       

오른쪽: The little Tower of Babel,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Roterdam)



그 변화의 흐름은 이제 귀족과 교회의 높은 지위를 가진 성직자를 그리는데서 벗어나 농민들의 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는 작업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이처럼 브뤼헬은 주제의 다변화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하고 있던 브뤼헬은 어쩌면 플랑드르 지역에서 가장 다양한 주제를 섭렵한 화가라고 해도 될 듯싶다.


그가 다룬 주제 중 특히 농민의 생활을 실감 나게 묘사한 작품들은 당시 새로운 변화 요구에 부응하는 소위 '풍속화'라는 이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풍속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농촌의 순박한 생활은 어쩌면 인간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상일지 모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순수함과 어리석음 모두를 드러내려고 했던 시도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뤼헬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시골의 결혼’이란 작품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중앙 뒤쪽에 신부가 푸른 휘장을 친 한가운데 앉아 있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일종의 관처럼 생긴 것이 보인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를 돋보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그녀는 다소 모자라는 듯이 보이지만 얼굴 표정은 매우 만족해하며 조용히 앉아있다. 그 양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마 신부의 부모로 보이는데 그 뒤쪽에 앉아 게걸스럽게 숟갈질을 하는 남자가 신랑인 듯 보인다. 


왼쪽: The Peasant Wedding, 1566–69                      오른쪽: The Peasant Dance, 1568

                       


왼쪽에는 안으로 들어오려는 일단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다소 소란스럽게 보이고 악사들은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어린아이가 앞쪽에서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먹고 있다. 또한 오른쪽 위 편에는 결혼식 축하를 위해 참석한 촌장인듯한 사람과 수도사인듯한 사람이 뻘쭘하게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다른 한편에서는 맥주를 열심히 따르고 있는 사내도 보인다. 


모두가 자기 일에 열심이지만 어딘가 소란스러우면서도 억압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고 있는데 어디에도 권위적인 분위기를 지닌 대상은 보이 지를 않는다. 더구나 한 화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표정을 가지고 독자적인 행위들을 하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것은 화가의 놀라운 통찰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분명 브뤼헬은 대단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왼쪽: Winter Landscape with a Bird Trap, 1565            오른쪽: The Hunters in the Snow, 1565        

왼쪽: The Return of the Herd(Oct.–Nov.), 1565   오른쪽: The Peasant and the Nest Robber, 1568



이런 풍속화가 주는 의미는 분명 당시 구교와 개신교 간의 갈등이 빚어놓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발전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결국 이런 노력을 통해 브뤼헬의 풍속화뿐만 아니라 플랑드르 화단이 새로운 발전을 지향해 나가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을 바탕으로 조만간 홀란드 출신의 화가들, 특히 베르메르와 렘브란트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브뤼헬은 1569년 9월 9일 40세 정도밖에 안된 나이에 안타깝게도 브뤼셀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브뤼헬은 브뤼셀에 있는 카펠레 교회(Kapellekerk)에 묻힌다.


한편, 큰 아들 소 피터르 브뤼헬(Pieter Brueghel de Jonge)과 작은 아들 대 얀 브뤼헬(Jan Brueghel de Oude)도 유명한 화가인데, 아버지한테 직접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장남 소 피터르는 아버지와 같은 제재의 작품 외에, 환상적이고 판타지적인 화면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헬'이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는데, 동생 얀은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헬', '천국의 브뤼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그의 손자도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그의 이름은 ‘얀 브뤼헬 2세’이다.


왼쪽: The Procession to Calvary, 1564     오른쪽:  Massacre of the Innocents, c. 1567   


왼쪽: The Triumph of Death, 1562, Museo del Prado, Madrid

오른쪽: Jan Brueghel Elder(브뤼헬 큰아들), The Visit of the leashold Farm, 1597


왼쪽: Jan Brueghel Elderr(브뤼헬 큰아들), Großer Blumenstrauß in einem Holzgefäß, 1606-1607

오른쪽: Jan Brueghel(브뤼헬 큰아들) and Peter Paul Rubens, Het aards paradijs met de Zondeval van Adam en Eva(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1615




(5) 루카스 반 발켄보르크(Lucas van Valckenborch)


루카스 반 발켄보르크((1535-1597)는 벨기에 루뱅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플랑드르 지역의 안트베르펜에서 활동을 했는데 초상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560년에는 화가조합에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한다. 당시 메클렌 화가 조합은 유화와 수채화를 주로 사용하며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 1579년부터 그는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스페인의 마티아스 총독의 궁정화가로 그림을 그린다. 이 당시 그가 그린 총독의 초상화는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주가를 높인다. 그러나 1582년 마티아스 총독이 자리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린츠로 돌아가자 발켄보르크도 그를 따라 린츠로 간다. 이곳에서 그는 도나우 강변을 오가며 많은 풍경화를 그린다. 


왼쪽: Spring Landscape(May), 1587                 오른쪽: Summer Landscape(July or August), 1585

왼쪽: Autumn Landscape(October), 1585   오른쪽: Winter Landscape(Janualy or February), 1586



그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섬세함은 그가 직접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또한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우리가 잘 보지 않는 세밀한 것까지 일일이 찾아서 그려 넣는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개미나 염소와 같은 각종 동물들의 섬세한 특징들을 자세히 그려 넣는 식이다. 


이런 화풍은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플랑드르의 대가 페테르 브뤼헬의 그림을 보게 되면, 그런 섬세함은 극에 달할 정도로 사물과 사람들의 행위를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그림 속에 사물(특히 사람)은 상대적으로 작아지기 마련이다. 


아무튼 발켄보르크는 1593년 초반에 여행을 하던 중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형을 만나면서 생활이 달라진다. 형을 만난 이후 그는 이곳에서 학교 선생으로 자리를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1597년 이곳에서 숨을 거둔다.

     

왼쪽: Portrait of Matthias of Austria, Lucas van Valckenborch, 1583

오른쪽: The Months,  Lucas van Valckenborch, 1584/87


The Tower of  Babel,  Lucas van Valckenborch, 1594, Louver Museum


     

(6) 요도쿠스 빙헤(Jodocus a Winghe)


요도쿠스 빙헤(1544-1603)는 브뤼셀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주로 브뤼셀과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한 화가인데, 4점의 유화와 20개의 드로잉 작품, 그리고 40여 점의 소묘 작품이 있다. 그러나 유화작품은 몇 점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 Samson and Delila, ca 1580,   오른쪽:  Apelles paints Campaspe,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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