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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0. 2016

플랑드르의 화가들(3)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0


(7)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루벤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플랑드르 지역이 종교개혁이 진행이 되면서 가톨릭을 수호하는 세력과 개신교를 신봉하는 세력이 공존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의 가톨릭 세력에 저항하는 개신교 국가인 홀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안트베르펜의 가톨릭 교회 세력이 점차 갈등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등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톨릭 진영의 대표주자로 플랑드르 지역에서 루벤스는 가장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벤스(1577-1640)는 17세기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과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미술 전통을 모두 견주어 볼 때 당시에 가장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의 미술작품을 그려낸 대표적 화가라고 하겠다.(* 앞의 글 ‘신화를 그리는 남자, 루벤스’와 ‘플란다스의 개, 그리고 루벤스’를 참조할 것.)


루벤스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1609년 10월 이사벨라와 결혼을 한 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궁정 초상화가로서, 그리고 종교 화가로서 대활약을 한다.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 오르는 예수’(Erection of the Cross)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Descent from the Cross) 같은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들을 통하여 루벤스는 플랑드르 지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바로크 화가로서 자리를 굳힌다. 


* Andromeda, Workshop of Peter Paul Rubens, 1640 

<그림 설명> 카시오페아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뽐내는 바람에 지중해에 사는 요정들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카시오페아는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를 바다뱀에게 제물로 바치는데, 이때 메두사를 처치한 페르세우스가 나타나 바다뱀을 무찌르고 그녀를 구해준다. 두려움에 질려있던 안드로메다는 그 순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 결혼을 한다. 이 이야기 구조는 영웅신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가 얼마나 명망 있는 화가의 지위를 누렸는지는 그의 작업 과정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루벤스의 명성은 우선적으로 안트베르펜 화가들의 길드가 정한 규정에 따르지 않고도 길드에 등록하지 않은 제자나 조수들을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그의 휘하에는 100여 명 넘는 문하생들이 자리하고 그들과 함께 수많은 그림들을 그리는 작업(* 이건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주문받은 상품을 제작한다는 게 더 어울릴듯하다.)을 하였다. 


어쨌든, 루벤스가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가 죽은 후 4년 동안 홀아비로 지내다 1630년 12월에 또다시 헬레나 푸르망이라는 16세 소녀와 재혼을 하면서 몇 가지 그의 그림 작업에 변화가 나타난다. 푸르망은 사실 죽은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의 조카인데, 그가 말년에 그린 여러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그의 신부 푸르망을 닮아 있었고 실제 푸르망을 모델로 한 그림들이 많았다. 20세를 전후한 푸르망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루벤스에게는 더없이 멋진 모델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오른쪽: Orpheus and Eurydice, 1630-1638, Prado Museum   

왼쪽: The Garden of Love, 1630-1635, Prado Museum

<그림 설명> 두 작품 모두 푸르망을 모델로 그렸는데, 특히 '사랑의 정원'의 그림 속 푸르망은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모피 망토를 걸치고 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인 1635년에 안트베르펜 인근에 있는 엘레웨이트 성을 구입한다. 그는 이 곳에서 안트웨르펜 교외의 시골생활과 풍경을 묘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루벤스는 오래전부터 가졌던 풍경화에 대한 관심을 의욕적으로 표출한다. 그의 풍경화 작품들은 목가적이면서 향수 어린 분위기를 보여준다. 


풍경화를 그리면서 루벤스는 어쩌면 이미 자신이 조만간 자연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염두에 둔 작업들은 결국 조만간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끝을 맺는다. 64살의 생일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왼쪽: 방탕한 아들의 귀환                                               오른쪽: 이탈리아 마을의 춤

왼쪽: 소가 있는 풍경                                                       오른쪽: 호숫가의 농장

왼쪽: 농부의 귀가                                                              오른쪽: 시냇가 풍경


          

(8)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플랑드르 지역에 또 한명의 천재가 태어난다. 바로 반 다이크(1599-1641)이다. 그는 1599년 벨기에 북부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반 다이크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비범한 실력을 인정받아 10살에 이미 유명 미술가의 도제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16살이 되자 이미 자기 소유의 공방을 가지고 독립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부유한 상업도시인 안트베르펜에는 화가 공동체가 있었는데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618년 화가 조합의 일원이 된 그는 루벤스의 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루벤스의 수석 조수가 된다. 루벤스는 반 다이크를 최고의 제자로 인정하고 그와 함께 공동으로 많은 그림을 제작한다. 두 천재의 만남은 그림을 누가 그렸을지 모를 정도로 닮아 있었다.


초상화 화가로서 반 다이크의 명성은 이미 21살이 되는 1620년부터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는 1620년과 1621년에 계속해서 영국을 방문하는데 영국 국왕 제임스(James) 1세를 위해 여러 달 동안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1632년 또다시 영국 국왕 찰스(Chales) 1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한다. r그때부터 반 다이크는 아예 영국 궁정의 전속화가로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린다. 


왼쪽: 반 다이크 자화상, 1633                                                           오른쪽: 신성가족, 1626/28

왼쪽: Nicholas Lanier, 1632                                        오른쪽: Jacomo de Cachiopin, 1634

왼쪽: Thomas Howard백작과 그의 부인 Alathea Talbot, 1639/40

오른쪽:  허공을 응시하는 여성의 머리 탐구, 1618/20



그는 궁정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도 받는다. 반 다이크를 유명하게 한 작품들은 대부분 촬스 1세와 영국 궁정의 귀족들을 그린 초상화이다. 그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수백 점의 초상화를 그린다. 이 그림들은 그 자체로서 이미 영국 회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반 다이크는 오랜동안 영국에 머무르면서 안트베르펜과 파리를 한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런데 1641년 아깝게도 42살의 나이에 반 다이크는 런던에서 생을 마감한다.


왼쪽: The Vision of the Blessed Hermann Joseph with Mary, 1630

오른쪽:  Cupid and Psche, 1638

왼쪽: The Capture of Samson, 1628/30                          오른쪽: Thetis and Hephaestus, 16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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