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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4. 2016

플랑드르의 화가들(4)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


2) 17세기의 홀란드 화가들


(1) 17세기의 도시 하를렘(Haarlem)

     

19세기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이주민들의 미국으로의 이민, 이들이 처음 뉴욕 인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도시 이름 ‘할렘(Harlem)’, 지금은 흑인 문화의 고향처럼 쓰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할렘의 고향 ‘하를렘(Haarlem)’은 아름답다. 예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를렘에는 스파르네(Spaarne) 강이 운하를 따라 흐르고 그 주변에는 오래된 집들이 늘어서 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넓은 광장에는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건 아마도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이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를렘(Haarlrm)은 10세기경에 "Haar-lo-heim“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단어는 3마디로 이루어졌는데 haar와 lo, 그리고 heim이 그것이다. 오래된 화란 어법에 의하면 lo는 숲(forest)이고 heim(heem, em or um)은 집(home, 또는 house)을 가리킨다. 그래서 ‘Haarlem’이라는 도시 이름은 'home on a forested dune', 즉 해수면보다 낮은 이 지역을 간척사업을 통해 일군 땅이기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De Adriaan Windmill: 1932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2년에 옛모습 그대로 재건립해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오른쪽: 어느 집 앞에 그냥 가져가라고 내놓은 책들, 소설류가 대부분인데 수십 권은 족히 될 분량이다.

Frans Hals Museum: 할스박물관은 17세기에 지어진 옛날 양로원을 개조해 1913년에 개장을 했다.



천년이 지난 이 도시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오래된 시간을 거슬러 수백 년 전의 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시계처럼 사람들은 이곳에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과거를 만나게 된다. 바로 프란스 할스 박물관(Frans Hals Museum)에서 그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고 즐길 수 있다. 프란스 할스 박물관에는 오래된 시간들을 진열하고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관람자는 어느새 액자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 그 시대를 공감하게 된다는 말이다. 프란스 할스 박물관이 주는 매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과거로 회귀하는 기분은 이 도시가 지닌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1574년 10월 3일, 네덜란드는 레이덴에서 그동안 네덜란드를 식민 통치하던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그동안 하를렘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다행히 살아남는다. 그 후 1579년 네덜란드 북부지방의 7개 주(지금의 네덜란드)가 위트레흐트에 모여 끝까지 스페인에게 항전할 것을 결의하며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을 공표한다. 위트레흐트 조약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종교적 관용과 종교 다원주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신호탄이 된다.


이로 인해 16세기 말 20여 년간 스페인이 장악하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플랑드르) 인구가 감소하고 반대로 북부지방인 암스테르담과 하를렘은 거의 배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플랑드르의 중심 도시 안트베르펜의 경우 8만 5천 명에서 4만 2천 명으로 줄어들지만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하를렘은 1573년도에 18000명 정도이던 것이 1622년에는 4만 명 정도로 대폭 늘어난다. 이중 50% 이상이 플랑드르가 고향인 사람들이었다.


왼쪽: 하를렘 시내에 위치한 성 바보 교회, 오른쪽: 흐로테(Grote)광장은 주말마다 장이 선다.



고향을 떠날 만큼 간절한 욕구, 바로 네덜란드가 지닌 ‘관용’(Gedogen)이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그러니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하를렘이 한편으로는 ‘관용의 도시’처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고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를렘에는 보물이 하나 더 있다. 하를렘만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맛, 전통방식으로 주조한 ‘요펜’(Jopen) 맥주가 바로 그것이다. 1992년 ‘요펜(Jopen)’ 교회를 양조장으로 개조한 후 2010년 11월 11일부터 공식적으로 일반에게 요펜 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2008년도에는 요펜 맥주 2가지가 세계맥주대회에서 모두 은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요펜 맥주는 원래 1407년도에 생산하던 ‘코이트’(Koyt)라는 맥주의 레시피를 바탕으로 제조한 전통방식의 맥주이다.


하를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래된 맛, 여전히 하를렘에서 17세기의 도시처럼 느끼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작은 행운일지도 모른다.

     

Jopen 교회를 양조장으로 개조했다. 교회앞 광장은 마을사람들과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왼쪽: 양조장으로 개조한 요펜 교회 내부, 낮에는 카페와 점심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으로 이용된다.


     

(2) 새로운 미술을 위한 진통


16세기 초엽의 네덜란드는 아직 15세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던 얀 반 에이크와 같은 뛰어난 거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격동의 시대를 소위 ‘풍속화’라는 장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페테르 브뤼헬 같은 화가가 출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존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옛날 방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알프스 북쪽의 독일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쪽의 미술가들이 어떤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것인가라는 기술적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데 반해 북쪽의 미술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회화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생겨난 문제였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당시 플랑드르의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커다란 수입원인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화가들에게 유일한 수입원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를 그리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출신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은 더 이상 독일에서 종교화를 그리며 화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1526년 당시 네덜란드가 배출한 위대한 철학자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가지고 영국으로 간다. 다행히 당시 영국의 헨리 8세로부터 궁정화가의 직책을 수여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시내 공원에 있는 프란스 할스 동상



홀바인의 경우처럼 운 좋게도 살아남는 화가도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따라서 서서히 이러한 상황은 결국 화가들을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회화의 경우 초상화 그리기가 여전히 화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네덜란드가 16세기 중반부터 시작한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기점으로 시민군과 특히 상인계층이 부상하면서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빛내줄 방법으로 초상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시민사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로 개인 초상화나 집단초상화를 원했다. 더구나 지역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지역의 위원회나 지방자치 단체의 위원들이 회의실이나 모임 장소에 집단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런 고객들의 취향을 그려내는 화가들은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란드에서는 지금까지의 미술시장의 관습과 다른 형태의 시장질서가 생겨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주문을 받아 작품을 납품을 하는 식으로 그림을 그려왔지만 이제는 점차 화가들이 미리 그림을 그리고 구매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에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상황이 도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미술가는 지금까지 처럼 한 사람의 구매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호를 가진 구매자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의 기호에 부합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팔기 위해 다양한 장르 모두를 소화하는 화가가 아니라 특별한 장르를 그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프란스 할스 자화상, 1633,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17세기 홀란드 화가들은 크게 4가지 분야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초상화(portrait)와 풍경화(landscape), 그리고 생활모습(still life)과 전문분야(genre)의 그림들(앞에서 풍속화라고 했던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풍경화의 경우에도 예전처럼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보다는 사람이 사라진 자연풍경만을 표현하고 채색도 거의 단순한 색감으로 변해갔다.


더구나 그림을 사려는 구매자가 늘어나게 되자 그림 제작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호이엔(Goyen) 같은 화가는, 갈색 계통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고 빠른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물감이 바로 갈색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갈색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을 테지만)


따라서 단색 위주의 그림으로 가능한 정감 있는 그림을 만들어 내려는 화가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시간을 절약하고 가격을 낮추게 되어 수요 공급의 원칙에 부합할 수 있게 된다. 호이엔이 그린 벌판 풍경은 간결하고 소박한 그림 속에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런 그림을 소위 ‘픽쳐레스큐’(pictureresque)라고 불렀다.


그런데 1568년 스페인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지역은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8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트베르펜을 떠나 암스테르담과 하를렘으로 떠나간다. 17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 미술시장은 이제 플랑드르에서 홀란드로 그 중심지가 바뀌고 있었다.


프란스 할스가 그린 초상화 작품들(1620년대 작품들),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3) 프란스 할스(Frans Hals)


하를렘에서 집단초상화를 그리며 네덜란드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작품 활동을 하는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년경~1666년)는 처음부터 시민 군단의 장교들을 위해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할스가 그리는 초상화는 틀에 박힌 구성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불안정하지도 않다. 그저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할스가 다른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처럼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각을 살려내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할스는 어느덧 하를렘의 거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사실 할스는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할스가 나이 서너 살밖에 안되었을 때 스페인 지배하의 안트베르펜을 떠나 북쪽에 있는 하를렘으로 이주를 했다. 그래서 할스는 이곳에서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De Magere Compagnie. 1637. Oil on canvas, 209 x 429 cm,  Rijksmuseum, Amsterdam

왼쪽: 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1616,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오른쪽: 양로원의 수녀들, 1640,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할스는 1610년 하를렘의 성 루가 화가 조합에 등록을 하고 활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할스는 30살이 되었을 때 자기보다 10살이나 아래인 신부를 맞아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는 결혼생활 5년 만인 1615년에 흑사병으로 죽고 마지막 낳은 어린 아들도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할스는 첫 번째 부인이 숨을 거둔 지 2년이 지난 1617에 재혼을 하고 8명의 아이들을 더 낳는다. 할스가 나이 60이 되자 성 루가 화가 조합의 의장이 된다.


프란스 할스가 그리는 집단초상화는 그 구성의 다양성과 인물의 성격 부여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할스가 그린 초기의 세밀한 묘사는 차츰 경쾌한 터치로 바뀌어 40대 중반부터는 거의 인상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밝고 근대적인 취향이 넘치는 걸작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60세가 될 무렵부터 그의 화풍은 어느새 묵직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표현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할스는 말년에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특히 그의 나이 7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거의 주문을 받지 못해 생활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이 80이 넘어 정부가 그에게 연금을 주자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 걸작을 남기게 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는 거의 웃음기가 사람진 사람들의 표정이 자뭇 심각해 보인다. 그게 삶이야 라는 식으로 그의 그림들은 깊은 고뇌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한다. 구도도 훨씬 단순해졌고 색채도 많이 줄어들어 다양한 색감을 사용하지 않았다.


왼쪽: Family Portrait, 1620, 프란스할스박물관        오른쪽: Schilderijen, 1625, 프란스할스박물관

왼쪽: Group portrait of the Regentesses of the Old Men's Almshouse, 1664, 프란스할스박물관

오른쪽: Group portrait of the Regents of the Old Men's Almshouse, 1664, 프란스할스박물관



결국 모든 인간이 그렇듯 나이를 먹으면서 청년기의 화려하고 활동적인 생각들은 어느새 나이가 들면서 무겁고 단순하고 고뇌에 찬 인간상으로 변해간다. 문득 페테르 브뤼헬이 나이 40세에 요절을 했을 때의 작품이 생각난다. 브뤼헬이 농촌의 결혼식과 농부들의 춤을 죽기 전에 그렸는데 만일 그가 할스처럼 나이 80 넘게 살았다면 죽기 전에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상상을 해본다. 아마 붉은 옷을 걸친 농부들은 갈색이나 무채색의 옷을 걸치고 춤을 추기보다 걷고 있거나 의자 같은 곳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는 정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아닐까?


비록 자유분방한 듯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그의 작품 구성은 잘 짜인 각본처럼 많은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닌다. 초상화, 특히 집단초상화의 거두라는 식으로, 그러나 할스에게는 그런 형식적인 평가보다는 인간의 웃음과 슬픔을 그려낼 줄 아는 화가라는, 인간의 내면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왼쪽: Officers and Sergeant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1633,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오른쪽: The military group portraits, 1663,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The military group portraits, 1620,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4) 하를렘의 화가들


① 야콥 코르넬리즈 반 오스트사넨(Jacob Cornelisz van Oostsanen)

반 오스트사넨(1470-1533)은 암스테르담 인근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한 화가로 성화를 그렸다.

     

The Hieronymus Altar, 1511, 예술사박물관, 비인



② 매르텐 반 헴스케르크(Maerten van Heemskerck)

반 헴스케르크(1498-1574)는 네덜란드의 종교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The Triumphal Procession of Bacchus, 1536/1537, 예술사박물관, 비인
Vulkan, Venus and Mars, 1540, 예술사박물관, 비인



③ 한스 프레데만 드 프리스(Hans Vredeman de Vries)

드 프리스(1527-1606)는 네덜란드의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화가, 엔지니어로 유명세를 날렸다. 1583년에 정원에 관한 서적도 펴내고 장식품(1565)과 원근법(1604)에 관한 책까지 발간을 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산책로가 있는 궁전,  1596, 예술사박물관, 비인
분수가 있는 궁전, 1596, 예술사박물관, 비인
음악가가 있는 궁전, 1596, 예술사박물관, 비인



④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얀 반 호이엔(1596-1656)은 네덜란드의 풍경화가이다. 그는 레이덴에서 태어나 35살에 헤이그에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1,200여 점의 작품과 천 점이 넘는 드로잉 작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르트레흐트(Dordrecht) 풍경, 1644,  예술사박물관, 비인

왼쪽: 강가 풍경, 1649,  예술사박물관, 비인                     오른쪽: 겨울 풍경, 1625,  예술사박물관, 비인



⑤ 헤라드 테르 보르크(Gerard ter Borch)

테르 보르크(1617-1681)는 주로 암스테르담에서 활동을 했는데 어려서 아버지에게 그림 전문 교육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80여 점인데, 6개는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박물관에, 6점은 베를린 박물관에, 5점은 루브르 박물관에, 그리고 4점은 드레스덴 박물관에, 3점은 게티 센터에, 2점은 런던 국립박물관에, 그리고 초상화 여러 점이 와싱톤 박물관에 소재하고 있다.


사과 깍는 소녀, 1660, 예술사박물관, 비인



⑥ 얀 스텐(Jan Steen)

얀 스텐(1626-1679)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적인 면을 부각하고 있다. 풍부한 색감을 사용해 유머러스한 점을 부각하려 노력한 화가이다. 그는 레이덴의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1648년에 동료와 함께 레이덴에 화가 조합인 센인트 루크 길드를 만들고 창립멤버로 활동을 한다. 그는 반 호이엔(van Goyen)의 조수

로 일을 하면서 그의 딸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53세에 죽고 만다.


왼쪽: 얀 스텐 자화상, 1670                    오른쪽: Skoklosters slott, 1665,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왼쪽: Beware of Luxury, 1663, 예술사박물관, 비인                                            

오른쪽: Fantasy Interior with Jan Steen and the Family of Gerrit Schouten 1660             

왼쪽: The dancing couple, 1663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오른쪽: Peasants before an Inn, 1653, 프란스할스박물관, 하를렘                    



⑦ 사무엘 반 훅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ten)

반 훅스트라텐(1627-1678) 화가이자 시인이다. 그가 13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데 그때까지 아버지한테 미술교육을 받는다. 그 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를 하고 렘브란트의 워크숍에 참여를 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왼쪽: Portrait of Matheus van den Broucke, 1670      오른쪽: Man at a Window, 1653, 예술사박물관

왼쪽: Adoration by the shepherds, 1647                                         오른쪽: 자화상,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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