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8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도시, 그 위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도시. 바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이다. 로테르담은 인구 60여만 명이 거주하는 네덜란드의 관문이자 유럽의 관문이다. 19세기에 북해와 라인 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가 완공된 이후 로테르담은 항구도시로서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와 수로로 연결되면서 크게 성장한다. 오늘날 로테르담 항구에는 하루 평균 100만 톤이 넘는 물자가 이동하고 있다.
라인강(Rhine)과 뫼즈강(Meuse), 그리고 스켈트강(Scheldt)을 잇는 북해 델타 지역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이점과 유럽 전역을 잇는 물류 시스템으로 인해 로테르담은 종종 "유럽의 관문(Gateway to Europ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테르담은 다른 도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도시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것을 실제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로테르담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 대부분이 “어 저거 예전에 어디서 봤던 건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디서’는 다름 아닌 우리가 언제인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이라는 의미이다. 언제인가 잠시라도 생각했던 것은 우리의 기억으로 마치 보았던 것처럼 남아있게 된다. 그러니 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쉽게 친숙한 느낌이 들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로테르담이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이라는 전쟁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네덜란드를 위시한 북부 유럽지역으로 침공한다. 독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로테르담을 먼저 점령해야 대서양 해전의 기선제압이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히틀러는 유럽 제일의 항구도시 로테르담으로 진격을 한다.
1940년 5월 14일. 60대의 나치 폭격기가 로테르담과 인근 킨더다이크를 비롯한 주변 지역을 잿더미로 만든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로테르담의 주민 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결국 네덜란드 여왕은 영국으로 망명을 하고 그날 오후 네덜란드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한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5월 17일에는 벨기에를 점령해 전선을 확대해 간다.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로테르담은 도시 80% 이상이 파괴되고 만다. 하지만 서울의 남산타워와 비슷하게 생긴 유로 마스터에서 내려다본 시내 경치는 마치 언제 전쟁이 나기나 했을까 싶게 말끔하고 아름답다. 우뚝 선 건물들과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은 흔히 보던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로테르담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로테르담을 상징하는 백조라는 별명을 가진 에라스무스 다리를 보면 쉽게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 다리는 네덜란드 건축가 UNstudio의 벤 반 베르켈(Ben van Berkel)이 설계했는데, 그동안 보아온 다리와 비슷하면서도 기본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런 게 소위 디자인이라는 것이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로테르담은 2차 대전이 종료된 후 파괴된 도시를 예전처럼 그대로 복원하지 않고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반면에 폴란드의 바르샤바같은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로테르담처럼 완전히 파괴가 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옛날 사진을 가지고 그대로 복원한다. 그래서 바르샤바는 옛날 짜르 시대의 분위기가 도시 속에 다시 살아나 고전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로테르담은 실험적인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욕구들이 네덜란드 건축가들에게서 공상처럼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느 유럽의 역사적인 도시와 달리 로테르담이 현대적인 도시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 계획의 결과라고 하겠다.
*로렌스 교회가 폭격 후 뼈대만 남은 것(왼쪽)을 전쟁 후 현재의 교회(오른쪽) 모습으로 복구했다.
* 로테르담 폭격이전 도시 모습을 찍은 사진들(로렌스교회를 지난 곳에 델프트운하가 있고 근처 사진속 모습과 같은 장소의 건물벽에 이 사진들을 부착해 전시하고 있다.
* 왼쪽 사진은 람 다리(Raambrug) 쪽에서 바라본 델프트 운하의 풍경이다. 1939년 이른 봄에 촬영한 것이다. 델프트 운하는 두 대의 배가 겨우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오른쪽은 전쟁 후 복구한 현재의 운하 모습
*왼쪽 사진은 델프트 운하 방향으로 난 거리 모습을 보여준다. 1908년 로테르담의 사진사 앙립 베르센브뤼헤(Henri Berssenbrugge)가 촬영했다. 오른쪽: 델프트 운하와 길게 뻗은 토렌스 거리 사이에 파라다이스 교회(Paradise church)가 서있는데 1781년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거의 다 부서져 시급히 보수를 해야 했지만 자금사정이 여유치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지어야 했다. 현재 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들은 예전의 교회에 설치했던 것이라고 한다.
국립 네덜란드건축협회(NAI)가 수도인 암스테르담이 아니고 로테르담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건 바로 이 도시가 현대건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로테르담은 바로 그 꿈을 펼쳐 보이는 장소가 되었다. 물론 모든 실험이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험적 노력 없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실험을 존중하고 실험적 노력을 용인하는 사회, 그 사회의 기본은 언제나 모든 실험적 시도가 자유로이 가능할 수 있다는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로테르담은 건축가들에게는 마치 캔버스 같은 곳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테르담 블라크(Blaak) 기차역 앞에 있는 큐빅하우스다. 1984년 피에트 블롬(Piet Blom: 1934∼1999)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아파트는 사각기둥 위에 정육면체가 올려져 있는 형태이다. 모두 38개의 작은 큐브(1개 큐브가 집 1채)와 2개의 대형 큐브, 14개의 상점 및 사무공간이 서로 맞물려 구성된 작은 아파트 단지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1984년도는 건축사에서 특기할만한 해였다. 자연과 사람을 결합한 비엔나의 상상력, ‘훈데르트바서 하우스’가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삭막한 도심에 자연과 사람을 맺어준 주거단지. 오스트리아 화가였던 훈데르트바서가 상상력을 구현하는 위대한 건축가로 알려지는 순간이다. 같은 해 로테르담에서도 상상력을 드러낸 ‘큐빅 하우스’가 세워진 것이다. 큐빅 원리를 이용한 공동주택, 건축가 피에트 블롬의 작품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블롬이 의도한 것은 개별 주택을 큐빅의 원리를 이용해 하나씩 연계시키고, 이것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주택을 이루는 것이다. 초기에 블롬이 의도한 방식은,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와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둥 주택’ 혹은 ‘수목 주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기초로 나무 가지에 해당하는 부분에 주택을 얹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목 주택들은 모여서 숲을 이룬다는 원리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아이디어는 좋은데, 너무 인위적이고 복잡해 거주공간으로는 2% 부족하단 느낌이 든다. )
큐빅 하우스를 보면서 네덜란드는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건축물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실용성에 문제가 있다고 입방아를 찧지만(* 필자가) 일단 기괴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하고 부럽지 않은가 말이다.
건축물이야말로 가장 실용성을 추구하는 대상일 텐데, 그야말로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과 응원이 없다면 큐빅하우스 같은 것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 디자인적 상상력만 따진다면 아마도 네덜란드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지금 세계 건축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의 상당수가 네덜란드 출신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건축의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고정관념을 뒤집는 자유로운 형태의 건축물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최초의 큐빅하우스는 네덜란드 축구팀 연고지인 에인트호벤의 헬몬트(Helmond)라는 곳에 있는 기둥 주택인데, 이 기괴한 주택들의 원래 개념은 '큐빅'이 아니라 '기둥 집'(Paalwoningen, 즉 Pole+Dwellings)이라는 뜻으로 '기둥식 주택, 막대형 주택'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피에트 블롬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한 그루 한 그루의 집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는 개념으로 이 수목형 주택을 설계했다고 한다.
1974년 헬몬트에 3개의 수목형 주택이 시범 설치되고 광장 근처에 수목형 주택으로 이루어진 작은 숲(아파트 단지)이 1976년 완성된다. 그 후 이 개념을 확장시켜 건설한 것이 바로 로테르담의 큐빅하우스(1984년 건축)이다.
*왼쪽: 로테르담 중앙역: 2014년 3월 완공했다. ‘Team CS’가 설계했는데 여러 설계사무소가 협력해 완성했다고 한다. 현재 역 입구에 있는 시계와 글자들은 기존의 역사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1940년 독일군 폭격으로 로테르담 도시 대부분이 무너졌을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 현재 시청사로 사용 중이다.
*‘마르크트 할’(Markthal: Market Hall): 로테르담의 블라크(Blaak) 광장에 2014년 10월 개장한 로테르담의 새로운 명물 시장 건물이다. 주말마다 서던 기존의 재래시장이 현대적인 공간에 입주해 대형마켓을 만든 셈이다. 마켓 안에는 주로 먹거리와 관련된 상점과 식당이 들어서 있다. 아치형 건물 천장에는 채소류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시스티나 성당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이런 실내 시장의 형태는 이미 바르셀로나나 코펜하겐, 그리고 스톡홀름 같은 도시에 세워져 인기를 얻고 있는데 드디어 로테르담에도 첫 번째로 세워져 로테르담을 상징하는 명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왼쪽: 로렌스 교회 주변의 야경들, 오른쪽은 시립도서관 건물 야경이다.
이 아파트는 현재 주택단지로는 불편사항이 제기되어 거주자들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그 공간을 2009년도부터 객실 49개를 갖춘 ‘Stayokay’라는 이름의 유스호스텔로 개조하여 일반인에게 숙박을 제공하고 있다. 로테르담 큐빅하우스에서 머무는 체험은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Stayokay Rotterdam, Rochussenstraat 107-109, tel) 436 57 63, http://www.stayokay.com/rotterdam )
로테르담은 현재 진행형 도시이다. 여전히 건축이 진행 중이고 새로운 실험이 기획되어 있다. 또 어떤 실험이 진행되고 어떤 결과를 보여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네덜란드인들의 실험정신, 그리고 실험을 뒷받침하는 자유로움, 어쩌면 이미 에라스무스가 지닌 자유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로테르담에서는 무엇이건 마음대로 시도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도시의 분위기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석양처럼 로테르담을 황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유로마스터(남산타워같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로테르담 전경, 왼쪽에 백조라는 별명을 가진 에라스무스 다리가 보인다. 에라스무스 다리는 로테르담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데 네덜란드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다리이다. ‘Ben van Berkel’이 설계했는데 1996년 완공되었다. 오른쪽은 로테르담 항구에 지는 저녁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