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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ug 13. 2016

그린란드의 자유와 굴종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그린란드  6


1. 그린란드의 자유와 굴종


1922년 ‘북극의 나누크’(Nanook)라는 제목으로 플레허티 감독은 무성영화 한 편을 세상에 내놓는다. ‘북극의 나누크’는 플레허티가 북극에 사는 나누크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누이트인들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엄동설한에 살아가는 그들만의 생존 방식은 다소 호기심과 기이함으로 다가오지만 인간의 본능과 삶에 대한 의지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세계 최초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개척한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 나누크 가족의 후손들이 사는 땅 그린란드, 그곳에는 이누이트인들 56,700명이 거주하고 있다.(에스키모란 말은 야만인처럼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란 뜻이라 '에스키모'라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긴다.)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여있어 그 누구도 쉽게 이곳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외로운 동토의 땅이다.


그곳에서 이누이트 문화는 이미 4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베리아의 우랄알타이 출신의 이누이트인들이 BC 2,500년경 베링해를 건너 캐나다 북부를 거쳐 그린란드 최북단 지역인 툴레(Thule)까지 도달한다. 그 후 그린란드 서쪽 해안가를 따라 남하하면서 크고 작은 부락을 형성해 살고 있다.


15세기에는 얼어붙은 그린란드 북부지역에서 6명의 부인들과 2명의 아이들 미라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린란드 특유의 문화는 분명 덴마크 문화와 다르다. 오히려 우랄알타이계의 몽골문화에 더 가깝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고래장의 유래” 등 여러 문헌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18세기 초 덴마크 왕국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누이트 종족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문화적 갈등과 함께 궁극적으로 이누이트 종족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누이트들은 전통적으로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데 그린란드 해안가를 따라 3~50여명씩 사람들이 모여산다. 전국에 120개의 촌락이 있다.


2. 그린란드의 근대화


1721년 덴마크 정부는 루터교 선교사 한스 에게드(Hans Egede)를 그린란드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 후 그린란드와 덴마크는 1830년대까지 철저한 주종관계를 유지한다. 덴마크 정부는 이미 한스 에게드가 그린란드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린란드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덴마크의 그린란드에 대한 근대화 노력은 실제로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근대화란 개념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바탕으로 사회 문화 정치 등 모든 분야가 총체적으로 변화, 발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린란드가 여전히 상대적 빈곤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이기에 근대화를 논한다는 자체가 조심스러울 뿐이다.


여하튼 그린란드의 근대화 문제를 외부로 끌어내게 된 계기는 세계 제2차 대전이 종료되기 전후의 시기에 고조되기 시작했다. 1940년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키고 5년간 덴마크를 침공, 지배한다. 이 시기 그린란드를 관할하던 덴마크 지방정부는 시민단체로 교체되고 그린란드 내 필요한 물자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해 사용하게 된다.


미국 상품의 존재는 지금까지 덴마크에만 고정되어 있던 그린란드 사람들의 세계관이 더 넓은 세계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그린란드 인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누크 시내에 있는 한스 에게드 동상


2차 대전이 종료되자 덴마크가 실시해온 그간의 그린란드에 대한 폐쇄적 고립정책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특히 덴마크가 그린란드와 함께 유엔기구에 가입하면서 그린란드의 근대화 문제는 더 이상 방관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특히 그린란드의 근대화 문제는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차별적 대우를 받아온 그린란드에 대해 더 이상 경제적 불평등만이 아닌 정치 사회적 평등의 개념을 반영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따라서 덴마크의 식민정책은 2차 대전 종료 후 변화된 국제적 분위기에서 더 이상 그린란드에 대한 그간의 식민정책을 그대로 적용할수 없게 된다. 이제는 새로운 식민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덴마크 정부는 1953년 드디어 그린란드를 지금까지의 단순한 지배와 종속의 식민지괸계에서 벗어나 덴마크 왕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고 공표한다. 그리고 1950년대를 위한 G50 정책과 60년대를 위한 G60 정책이라 이름 붙은 10년 단위의 두 개의 그린란드 개발정책을 공표하고 이를 위한 새로운 투자계획을 발표한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덴마크 정부가 이차대전 후 국제적으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국제환경은 분명 그간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간 식민지 위치에 있던 제3세계 국가들이 2차 대전 이후 대부분 독립을 이루는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고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린란드 역시 독립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덴마크도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반응과 대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덴마크 정부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그린란드에 대한 투자를 한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투자를 고려한 그린란드 개발 정책을 세운다. 이 정책은 일단 그린란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린란드 국내 자본시장에 대한 덴마크 정부의 투자계획은 사실상 최초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린란드로서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코펜하겐 시내 중심가 교회 벽에 한스 에게드 선교사 부부를 기리는 석판을 붙여 놓았다.


1721년 한스 에게드가 그린란드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그린란드에 한 번도 제대로 된 투자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들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동안 덴마크는 그린란드로부터 자연자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원을 일방적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명실공히 그린란드는 식민지로서 단순히 덴마크의 부를 축적하는 교두보 역할만을 충실히 해왔을 뿐이다. 그린란드가 단순히 덴마크의 식민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재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해마다 6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적지 않은 액수라고 말 할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린란드에 대한 투자가 단지 베풀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덴마크가 그린란드에 대한 투자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이상의 이익을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덴마크 정부가 그린란드로부터 적지 않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덴마크가 그린란드 지배를 시작하면서 그린란드와 덴마크에 설치된 각종 그린란드 관련 직업들은 덴마크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환경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수많은 일자리 창출은 결국 덴마크 자국민들에게 양질의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기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지배하는 대가로 나토 연합국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나토에 대한 별다른 비용 지불 없이 단지 그린란드 북부지역에 미공군기지를 설치하도록 협력한 대가로  회원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혜택은 덴마크가 그린란드에 투자한 금전적인 규모에 비하면 그 이상의 효과를 보고 있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그린란드에는 개신교(루터교) 교회만 보인다. 좌측 사진은 한스 에게드를 기리는 교회



3. 대등한 관계를 위하여


그린란드 북극지방의 이누이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985년부터 한스 에게드가 그린란드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초반까지 이누이트들은 당연히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이누이트들이지만 해안가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고래잡이와 물개잡이 등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꾸려왔을 것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한스 에게드가 그린란드를 지배하기 시작한 1721년부터 지금까지 과연 얼마나 대등한(equal)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당시 한스 에게드가 선교사의 신분으로 그린란드에 파견되었지만 그가 맡은 역할은 분명 그린란드를 통치하는 총독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또 다른 역할이란 바로 그린란드 인들을 토속신앙으로부터, 그리고 로마 가톨릭 영향으로부터 루터교 신자로 바꾸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식민지 그린란드를 통치하는 덴마크 정부의 가장 주요한 식민통치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따라서 덴마크와 그린란드 간의 ‘대등한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동일한 종교를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관계 형성이 주된 것이었다.(* AD 313년 로마제국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북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유럽 주변국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전파한다. 그 후 16세기 초반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자 덴마크를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은 루터교를 국교로 삼고 로마 가톨릭 세력과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인다.)


이런 상황에서 덴마크는 그린란드 뿐 아니라 당시 자국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와 페러 제도 등에 대해 루터교로의 개종을 강요한다. 당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로마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을 기초로 로마제국과 결별하는 주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덴마크 뿐 아니라 스웨덴 역시 핀란드를 650년간 지배하면서 제일 먼저 루터교로 개종을 강요해 종교적 일체감 형성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북부 유럽, 즉 덴마크 식민지인 그린란드를 비롯해 아이슬란드와 페로제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모두는 루터교로 개종을 한다.


인구수만큼 교회가 있는 듯...^^


한스 에게드 이후 111년간 진행된 덴마크의 그린란드에 대한 초기 식민정책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인들의 견지에서 봤을 때는, 단지 그린란드가 덴마크에 종속되어 있는 식민지중 하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진행된 덴마크의 종교적 선교활동을 통해 형제애를 이루는 것이 두 국가 간의 관계에 가장 중심적인 목표였기에, 그린란드의 이누이트들은 덴마크가 강요하는 루터교로의 개종을 받아들임으로써 식민지 국가의 위상에서 벗어나 지배국과 심리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심리적 위안을 받으려 했던 것이라 볼수 있다.


그러나 1807년부터 7년간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은 점차 유럽 국가들이 그린란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신호탄이 된다. 따라서 1828년 덴마크 왕 프레데릭 6세는 그라아(W.A.Graah, 1793-1863)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그린란드에 파견한다. 그라아는 그린란드 동부를 비롯한 그린란드 전역을 탐사하고 돌와와 그린란드 주민들에 대한 실태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가 보고한 핵심적인 사항은, 그린란드에 대한 덴마크 식민정책 관계자들이 그린란드에 대한 식민지배를 위해 기본적 목표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덴마크는 그의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식민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그린란드와 덴마크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보다 치밀한 정책 수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830년대 당시에 실시한 첫 번째 정책적 변화는, 그린란드 주민들이 어렸을 때부터 덴마크와 정신적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기초교육 강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데 목표를 두고 정책 수립을 진행한다. 그 후 그린란드와 덴마크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은 소위 ‘사회진화론’(social evolutionism)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유럽에 번지기 시작한 ‘사회진화론’이라는 이 ‘새로운 이론적 사조’는 18세기에 풍미했던 ‘계몽운동’ 이론들(Emlightenment theories)을 대치하기에 충분했지만 식민지에 대한 그간의 사고의 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틀로 작용하는데 그치고 만다. 따라서 그린란드에 대한 제도적 근대화나 대등한 관계 설정 등은 단지 구호에 그칠 뿐이었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가 말 할수 있는 것은 단지 그린란드와 덴마크의 관계가 정치 사회적으로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여전히 덴마크에게 부담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덴마크 정부는 과연 그린란드에게 어떤 도움을 줄수 있는지 진솔한 고민을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덴마크인 거주지역



4. 그린란드 자치권의 특징


1832년부터 1953년 사이에 덴마크와 그린란드와의 관계, 즉 그린란드에 대한 덴마크 식민정책의 변화 여부, 대등한 관계 등에 관한 논의 등은 덴마크가 그린란드에 대해 얼만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과연 덴마크는 그린란드와의 대등한 관계 유지를 위해 식민정책에 변화를 주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하는가? 그린란드에 대한 덴마크 정부의 정치적 입김은 사실상 더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특히 1953년 이후 덴마크 정부가 그린란드에 대해 주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은 자치권이라는 단어가 지닌 단어적 과장일 뿐 그린란드인의 실질적 자치는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또한 1979년 덴마크 정부의 그린란드에 대한 기본정책 역시 그린란드 인들을 대등하게 덴마크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소위 ‘홈 룰’(Home Rule)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린란드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실질적으로는 교묘히 식민지배를 강화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린란드 인과 덴마크 인간의 임금격차에 대한 것이다. 그린란드인은 덴마크인에 비해 같은 노동상황 하에서 60%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를 못한다. 그린란드인은 2등 국민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종차별주의로 인식되면서 덴마크의 사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1830년도 이래 지금까지 덴마크 정부가 주장한 그린란드와의 대등한 관계 설정 정책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1992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페터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보면 그린란드 출신의 스밀라 눈에 비친 두 나라 간의 불평등 문제가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1979년에 제정된 덴마크의 그린란드에 대한 식민정책의 기본법이라고 할수 있는 덴마크의 홈 룰(Home Rule) 규정은 오히려 그린란드에게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자극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드디어 1999년 그린란드 자치정부수립위원회(Selvstyrecommissionen)를 결성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이 단체는 순수 그린란드 민간단체로서 2003년까지 활동하면서 그린란드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발전정책을 제시한다. 당연히 이런 움직임은 그린란드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밝히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1832년 당시 덴마크 정부가 조사한 그린란드에 관한 여러 기초 자료들은 여전히 그린란드를 통치하는 기초 자료로 사용되고 있어 두 나라의 변화된 정책을 마련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덴마크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그린란드에 대한 보다 새로운 자료나 통계수치 등의 필요성을 부인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덧붙여 최근에는 덴마크 정부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북극지방연구 관련학과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새로운 대학 정책안을 발표하여 그린란드에 대한 관심은 더욱 형식에 그치고 있는 느낌이다.


더욱이 덴마크 정부가 실시하는 그린란드와 덴마크에 거주하는 덴마크인들과 그린란드 주민들과의 불평등 대우는 더욱 갈등을 야기할 뿐이라는 점까지 묵살됨으로써 국제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그런데도 덴마크 정부는 일관되게 그린란드에 대한 문제를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식민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크 시 문화센터, 이 건물에  그린란드 자치정부 사무실도 들어 있다.



5. ‘홈 룰’은 과연 자율성을 보장하는가?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가 독립을 요구하자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대신 자치권을 주겠다며 자치권의 골자를 담은 소위 ‘홈 룰(Home Rule)’을 그린란드에 제시한다. 1979년 5월 1일 그린란드 주민들 63%가 덴마크가 제시한 ‘홈 룰’에 대해 찬성 투표를 한다. 이에 따라 그린란드는 2009년 6월 21일 자치정부를 구성,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린란드는 외형상 외교와 군사, 국방권을 제외하고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홈 룰 체제의 개시와 더불어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해마다 그린란드 경제의 2/3을 차지하는 규모의 35억 덴마크크로네(미화 6억 달러 상당)를 지원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그린란드 자치권의 주요 골자이다. 그동안 덴마크에 거주하는 그린란드인들은 2등 국민으로 존재해 왔다. 덴마크인들에게 그린란드인들은 단지 문명화시켜야 하는 대상으로서 미개인일 뿐이었다. 1979년에 제정된 홈 룰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미개한 그린란드인들을 어떻게 덴마크인들처럼 문명화된 시민으로 근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 목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홈 룰은 단지 덴마크 왕국의 기본 정신을 강조하는 식민정책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린란드와 덴마크 간의 관계 개선에 필요한 조건을 명시한 것이라고 할수 없다. 더욱이 문제는 그런 정책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그린란드인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덴마크인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그린란드인을 부정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린란드인의 미개한 이미지는 어쩌면 덴마크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일수도 있다. 따라서 덴마크가 적지 않은 덴마크의 예술가들과 행정가들을 동원해 그린란드의 문명화(civilization)를 꾀하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불필요한 그린란드인에 대한 불평등과 불만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덴마크의 그린란드에 대한 강압적인 문명화 정책은 1960년대에 대두한 그린란드 젊은이들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으로도 작용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덴마크의 홈 룰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린란드 독립운동에 더 이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전략적 정책으로서 쐐기를 박기 위한 조처였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홈 룰의 배경에 대한 것은, 덴마크의 식민지들인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그리고 페로제도에 대한 덴마크의 식민정책을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이차대전이 끝나자 덴마크의 영향 하에 있던 세나라, 즉 아이슬란드와 페러 제도, 그리고 그린란드는 각기 독립에 대한 의지를 밝힌다.


누크 시 공동묘지


제일 먼저 아이슬란드가 1944년 6월 17일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해 지배하던 시기에 독립을 선포하자 덴마크는 이를 받아들여 아이슬란드는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46년 페로제도 역시 아이슬란드와 같은 식으로 독립을 선언하려 하지만 덴마크의 거부로 독립은 유보되고 대신 페로제도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덴마크의 ‘홈 룰’을 받아들이게 한다. 즉 페로제도의 문명화 사업을 추진하는 조건으로 제한적인 자치권을 하용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린란드는 1953년도에 이르러서야 덴마크가 자치를 위한 홈 룰을 제시한다. 그린란드 자치권의 개요는 그간의 일방적인 종속관계에서 군사 외교권을 제외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과연 그것이 진정 그린란드에 대한 식민정책의 변화를 꾀한 것인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홈 룰에 명시한 ‘그린란드 자치권’의 주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 경찰을 비롯한 사법 재판권은 제외한다.

- 국방과 군사에 대한 권한도 제외한다.

- 외교에 대한 권한도 제외한다.

- 그린란드의 통화 화폐는 덴마크 크로나로 한다.

- 그린란드는 덴마크 왕국의 일부이기 때문에 재산 상속과 시민권 등에 대한 권한은 덴마크가 보유한다.


이런 내용들을 볼 때 결코 그린란드의 실질적 자치권은 너무 허울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제도적인 문제점을 보면, 아주 적은 인구 56,700명의 그린란드는 2009년부터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위해 또한 ‘의회’(Landsting)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4년 임기로 중임할수 있는 의회 의원은 오직 그린란드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의 덴마크인들 중에서 선출한다고 관련 법령에 명시하고 있다.


그린란드 의회의 역할이 각 지방의 주요 행정관료나 책임 있는 업무 수행자들을 선출하고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도맡아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그린란드의 정책 집행기구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린란드 의회 구성이 이누이트들로 구성되지 않고 덴마크인들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그린란드 자치권의 내면이 결국 실질적인 자치라기보다 식민통치 지배가 변형된 형태로 위장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여전히 그린란드 의회뿐 아니라 그린란드 주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예나 지금이나 “그린란드가 덴마크 왕국의 일부로 존재하며, 그린란드 주민들 역시 덴마크 왕국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환경미화 작업을 마친 아파트들



6. G60은 무엇인가?


1953년 덴마크는 그린란드에게 자치권을 인정하는 홈 룰을 제시하면서 그린란드를 위한 복지혜택을 위해 1950년대의 사업으로 G50과 1960년대 사업으로 G60 정책을 공표한다. 이에 따라 덴마크 정부는 우선적으로 그린란드에 대한 광산 임대를 포함한 광물자원관리에 대한 기본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고 새로운 정책을 마련한다.


이러한 기본 정책방향에 따라 덴마크는 G60 정책을 실시하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이누이트들을 닭장같은 아파트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이것은 그린란드 주민들에 대한 적절한 거주시설과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는 명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낚시와 사냥을 기본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주를 단행한 것은 잘못된 정책으로 밝혀진다. 아파트로 이주한 후 그린란드 젊은이들은 점차 이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그린란드인들 역시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누이트인들이 과거 해안선을 따라 거주하던 시절, 전통방식으로 사냥을 하며 살던 삶은 세계 최저의 자살률을 자랑했다. 덴마크 연구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그린란드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0.3명이었고 심지어 1960년대까지 그린란드 본토인들 중에는 자살한 기록이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자살률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1986년에 이르러서는 청소년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전 국민의 20%가 넘는 인구가 몰려있는 그린란드의 수도인 누크(Nuuk)인데,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이누이트들이 사는 회색빛 아파트 군락 지역과 누크의 실질적인 중심가라 할수 있는 덴마크인들 거주지역인 올드타운의 화려한 색상의 집들 사이에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회색의 아파트 군락은 1950년대에 소위 G60 정책에 따라 세워진 것들인데 이곳으로 그린란드 주민들은 강제로 대거 이주를 한다. 작은 마을에 거주하던 그린란드 주민들은 소위 미개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새로운 직업을 얻기 위해 도시로 이주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덴마크의 입장에서 그린란드 문제를 처리하다 보니 그린란드 현대화의 방향이란 것이 전혀 그린란드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라는 인류학 보고서에서, 문화는 나라마다 다르긴 해도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고 야만적인 문화는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구 중심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오만과 편견에 경종을 울린 바 있다. 이러한 점은 1968년 유네스코 산하 맥브라이드위원회가 발간한 “One World Many Voices”라는 보고서에서도 발견할수 있는데, 맥브라이드위원회가 강조한 것은 바로 책 제목처럼 “하나의 세계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어떤 문화가 더 우월하거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그린란드인들의 세계 자살률 1위라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세계, 다양한 문화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데도 덴마크는 이누이트족을 아파트라는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 둠으로써 그린란드 문화를 억압의 문화, 하등 문화로 규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교로 개종하고 보조금만 지급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식민정책은 어느덧 선심을 베푸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정책인 것처럼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촌부락 마을에 거주하는 이누이트들을 아파트로 이주시켜 통제하기 쉽게 집성촌을 만든 덴마크 정부


7. 식민지여 영원하라!


그린란드에서 1953년도부터 시작된 신식민주의 정책은 그간의 식민주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시금 기억하길 바란다. 단어적으로 홈 룰(Home Rule)이라는 용어로 치장된 신식민정책은 간혹 그린란드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의 정책적 변화는 단지 2차 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일게 된 예전 식민지에 대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덴마크 정부의 변화된 대외 식민정책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덴마크는 궁여지책으로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에 의도적으로 획책한 전략적 변화라고 밖에 볼수가 없다.


또한 덴마크에게 그린란드가 식민지라는 의미는, 선교활동과 동시에 교역 거점지역으로서의 역할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덴마크인들이 누리고 있는 개인적인 우월적 지위는 그린란드 주민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체계를 적용받으며 여전히 차별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결국 그린란드인들로 구성된 지역단체와 덴마크 출신 지역단체 간에 서서히 갈등 상황으로 표출되고 심지어 새로운 인종주의적 갈등 양상으로 까지 전개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진정한 그린란드의 자치와 자유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희박하기만 한 것일까? 소수의 인구로 어떤 힘 있는 움직임도 쉽지 않은 상황이기에 국제적 연대가 그린란드에게는 절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하 식민지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먼저 그린란드의 자유가 보장되기를 절실히 바라며, 아울러 이 글이 덴마크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줄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참고문헌

-Klaus Georg Hansen, “Modernization of Greenland”, Denmark and it’s Colonies. pp.86-88.

-Knud Sinding(ed.), Mineral Development and Mining Policy in Greenland, The Univ. of British Columbia, 1993.

-Lars Jensen, “Home Rule”, Denmark and it’s Colonies. pp.80-82.

-Nazanine Moshiri, “Greenland’s Inuit fear for way of life”, Aljazeera, 2010. 11.Sep.

-Robert Petersen, “Colonialism as seen from a former Colonialized Area”, Arctic  Anthropology, Vol.32, no.2(1995), pp.118-26.

-Factsheet Denmark,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Denmark, February 2010.

-The Greenland Home Rule Act. Act Nr.577 of 29 Nov.1978. Meddelelser om Grønland, Man and Society 1/1980, pp.15-20.

경향신문, 2016.08.03., “‘에스키모학’이 얼어붙고 있다. 전 세계 단 한 군데 ‘에스키모학과’ 100년 만에 문 닫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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