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어리석었지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마음만큼만은 대단하다고 확신했던 적도 있었다. 좋은 사람들로부터 건강한 생각을 전달받았고 그걸 나눠주는 일까지 자연스레 일상에 녹아있었다.
별 거 없었던 나를 대단하게 만들어준 데에는 항상 친구가 옆에 있었다. 내 자존감이 바닥 치는 날에는 "네가 어때서~"라는 말을 진심을 담아 해 줬고 주고받은 편지에는 "앞으로 더 이기적여지자"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그 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순간 그렇다고 믿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에는 몰랐던, 그래도 나도 나은 점이 있구나 하는 걸 사람다움 혹은 성격 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 대학교 3, 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어느 순간 어느 시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이거 하나 믿고 험난했던 20대를 버텨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년 전 친한 언니를 만나서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는데 그 모든 게 와장창 무너져 버렸다. 그 언니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했던 건 전혀 아니었다. 여태까지 내가 갖고 있던 환상 같은 게 깨져버리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환상이 아닌 사실인 줄 알았는데 그게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라고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보니 스무 살 이후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에게 지적이란 걸 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하찮은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을 한켠에 만들어 놨는데 그건 그냥 나만 보이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비참하고 슬펐던 건 언니와의 대화 중에 그걸 깨달았음에도 나는 내 자존심에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였다. 온갖 말로 나를 포장하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변명이 모래성처럼 뭉쳐 놓으면 무너져 버리고 다시 애써 뭉쳐 놓으면 또 무너져 버리고를 반복하는 거였다. 강한 파도가 치는데 그게 보이는데도 어리석게 쌓이지 않을 모래성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이걸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 대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원점은 0이 아닌 마이너스라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갖고 있었다. 그걸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시간보다 그대로 인정해버린 시간이 더 길다. 지금은 그 마음이 쌓이고 쌓여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지난날에 나의 모래성은 쉽게 무너져 버렸지만 이 마음만은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