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연 Mar 25. 2022

나의 쓸모

02 어리석었지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마음만큼만은 대단하다고 확신했던 적도 있었다. 좋은 사람들로부터 건강한 생각을 전달받았고 그걸 나눠주는 일까지 자연스레 일상에 녹아있었다.


  없었던 나를 대단하게 만들어준 데에는 항상 친구가 옆에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 치는 날에는 "네가 어때서~"라는 말을 진심을 담아  줬고 주고받은 편지에는 "앞으로  이기적여지자"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순간 그렇다고 믿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에는 몰랐던, 그래도 나도 나은 점이 있구나 하는 걸 사람다움 혹은 성격 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 대학교 3, 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어느 순간 어느 시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이거 하나 믿고 험난했던 20대를 버텨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년 전 친한 언니를 만나서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는데 그 모든 게 와장창 무너져 버렸다. 그 언니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했던 건 전혀 아니었다. 여태까지 내가 갖고 있던 환상 같은 게 깨져버리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환상이 아닌 사실인 줄 알았는데 그게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라고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보니 스무 살 이후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에게 지적이란 걸 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하찮은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을 한켠에 만들어 놨는데 그건 그냥 나만 보이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비참하고 슬펐던 건 언니와의 대화 중에 그걸 깨달았음에도 나는 내 자존심에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였다. 온갖 말로 나를 포장하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변명이 모래성처럼 뭉쳐 놓으면 무너져 버리고 다시 애써 뭉쳐 놓으면 또 무너져 버리고를 반복하는 거였다. 강한 파도가 치는데 그게 보이는데도 어리석게 쌓이지 않을 모래성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이걸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 대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원점은 0이 아닌 마이너스라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갖고 있었다. 그걸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시간보다 그대로 인정해버린 시간이 더 길다. 지금은 그 마음이 쌓이고 쌓여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지난날에 나의 모래성은 쉽게 무너져 버렸지만 이 마음만은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쓸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