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일그러지지 않았지만 딱딱하게 각이 잡히지도 않은 상자 하나가 있다. 크기도 모양도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그래서 조금은 웃기기도 하다. 그곳에 작은 마음 하나를 살며시 내려놓았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한없이 불어나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상자의 문이 열렸다. 잠겨 있진 않았지만 다가오라 손짓한 적도 없는 그곳에.
어느 날 저 멀리 작은 점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눈에 띈 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점을 촘촘하게 엮었더니 하나의 선이 되었고,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교차점을 만들어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점은 또다시 불어나기 시작해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어릴 때부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자에 담아두는 걸 좋아했다. 대게 편지나 사진, 누군가로부터 받은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 같은 것들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영원할 것만 같았다. 또 어떤 날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작고 하찮은 마음 같은 것들을 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자들도 가득했다. 열고 싶지 않지만 온종일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마주하게 만들면서 괴롭히는 것들도 있고, 너무 작고 미세해서 보이지조차 않는 것들도 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왔다간 줄도 모르고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에게서 빛났던 것처럼 더 반짝이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잘 해내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이뤄낼 것만 같은 믿음 또한 있었다.
그래서 너무 솔직해서 민망할 정도의 작은 마음까지 모조리 담아냈다. 내가 건넨 손을 잡아주면서 꼭 그렇게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맙다면서 상자 하나를 슬며시 건네는 거였다. 우리는 예쁜 마음을 고이 접어 간직했다. 웃긴 일도 화나거나 속상한 일도 다 털어놓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로 가득 찬 카톡 대화창처럼 실없는 대화도 주고받았다. 마치 어릴 때 했던 교환 일기장처럼 그랬다.
대단히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은 상자 속에는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들이 더 많았다. 그 별 것 아닌 것들이 뭉쳐 있으니 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 낸 상자 안에는 언제 어떻게 쌓여가는지도 모르게 가득 차 있었다. 상자의 크기가 불어나는 속도는 엄청났고 얼마나 더 많은 걸 담아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안에 더 많은 시간들을 담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써 꾸미거나 의도하지 않아서, ‘어쩌다 보니’ 생겨 더없이 소중해진 마음 상자가 나에게 생겼다. 이것은 누구 하나가 마음을 놓아버리는 순간 사라질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
꼭 "언니 언니"라고 반복해서 다급하게 불러놓고선 결국 시시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