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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표 Feb 18. 2016

"사실"로 "진실"을 왜곡하는 법 (통합)

포토 저널리즘과 파울 요제프 괴벨스

글에서 사진으로, 포토 저널리즘의 태동


요즘 뉴스 기사들은 이미지(사진) 하나 없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 문장(텍스트)으로 6하원칙에 따라 사실을 전달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사진으로 강렬한 메시지가 직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에, 많은 기자들과 컨텐츠 제작자들은 이미지(사진)가 포함된 글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신문 기사는 오로지 "글"로 사실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실질 문맹률이 높은 당시(근대 유럽)에 신문 매체가 지금처럼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지요. 독해력이 있는 일부 지식인들이 남들보다 빠르게 새 소식을 입수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사회 여론의 형성은 입소문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6일자 경향신문,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신문만 보아서는 대체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처참하고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싶어도, "끔찍한", "지옥 같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같은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 밖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뉴스 구독자들에게 글로 감정을 전달하려니 그리 강렬한 메시지를 주지 못하였기에,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카메라가 발명되고 쉽게 휴대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수식어구로 묘사된 기사 글에서 탈피하여, 현장의 모습 그대로를 마치 내 눈앞에서 본 것과 같은 사진이 신문 기사에 실리게 된 것이지요. 사람들은 전쟁터 속에 군인들의 시체가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최전선의 참혹함을 경험하였습니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 조차도 보도 사진을 통해 얼마나 잔인한 전쟁이 자행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사상 가장 처참했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들, 우리에겐 평범한 전쟁 사진의 하나로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많은 유수의 언론사들은 이때부터 사진이 곁들여진 뉴스 기사를 보도하였고, 사진가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매그넘"도 이 즈음에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초창기 매그넘 출신의 사진기자들은 주로 전쟁터의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거나 자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사진을 찍어 보도하였습니다. 신문 매체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여론을 형성하는 데 앞장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전이라면 단순히 전쟁이 일어나고 몇 명의 군인이 죽었다는 정도의 사실밖에 전달할 수 없었지만, 사진이 실린 신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의 무서움을 체험하고 그를 통해 어떤 감정적인 울림을 전해주었습니다. 때론 반전을 호소하기 위한 여론의 형성을 목적으로, 그보다 많은 경우에는 상대 국가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지요.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포착한 이 사진은, 미국 내 반전 여론을 일으켜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1973년 퓰리쳐상 수상, 소녀의 절규)




사진, 뺄셈의 미학


잠시 주제를 바꾸어 사진의 속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뺄셈의 미학", 사진 예술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거의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연속된 실제 세계의 시공간을 카메라의 네모난 시야에 가둠으로써,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기록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예술인 것입니다.


사진 기술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는 그저 "기술"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돈이 없는 서민들이 기념적인 날을 기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돈이 많은 귀족층들은 저명한 화가들을 고용하여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초상화 및 기념적 사건의 그림을 남겼는데, 이는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었지요. 사진은 훨씬 싸고 빠르게 귀족들의 문화를 흉내 내는 수준에 그쳤기에 예술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을 지향한 일부 사진가들 또한 회화적 기법을 흉내내기 위해 유화의 느낌을 살려 필름을 현상하는 데 집중하였고 전통적인 회화의 입장에서는 따라쟁이, 아류에 불과한 수준 낮은 문화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순수 사진을 가지고도 예술에 가까운 심미성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순수사진(Straight photo)라고 불리는 조류인데, 당시 급격한 산업 성장을 이루던 미국의 모습들을 적절한 사진 구도에 담음으로써 사실적 묘사와 조형과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선보였던 것이지요.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A. 스티글리츠의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예술적 표현의 사진들


스티글리츠는 그냥 지나쳐버릴 만한 뻔한 상황을 카메라로 구획하고 시간을 담아내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이후 여러 사진작가들이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사진 예술을 발전시키면서, 구도와 깊이, 대비와 비율 등을 통해 사물에 뜻을 부여하고, 이것들의 상호 작용을 통한 *콘텍스트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회화가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덧셈의 예술" 이었다면, 이미 꽉 차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만 따와 필름에 담는 사진은 "뺄셈의 예술" 이었던 것이지요.


*콘텍스트(context) : 맥락이나 문맥 등을 뜻하는 용어로,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텍스트 간 상호 관계 속에 드러나는 의미적 요소




사실로 진실을 왜곡하다


포토 저널리즘은 사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목적을 가졌지만, 대중들에게 좀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콘텍스트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 명확하게 기사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다른 신문사보다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해서도,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사진을 찍고 보도하였습니다. 새해의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전달하기 위해 신년의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연인의 뜨거운 입맞춤을 표현하거나, 수능 시험의 긴장감을 보여주기 위해 뒷 배경을 모두 흐리게 처리하고 홀로 괴로운 표정으로 고민하는 수험생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지요.


다만 이런 콘텍스트적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사회 여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움직이고 싶었던 권력층들은 언론 및 신문 기자들을 통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보도 기사 및 사진을 조작하였습니다. 허위 사실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실제 벌어진 사건을 교묘하게 편집함으로써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경우가 더욱 많았지요.


세계 2차대전 이오지마 상륙작전 중 미군 승리의 상징으로 사용된 사진, 당시 미 국민들에게 큰 사기를 복돋아주었으나 후일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기 위한 조작된 연출로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위 사진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증시 전광판을 배경으로 고민에 빠진 듯한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주식시장이 하락하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씩 떼어내어 각 대상을 살펴본다면, 뒤의 전광판은 그저 주식 현황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고, 앞의 시민들은 아래를 쳐다보며 턱을 괸 사람들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 두 대상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사실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으며, 그저 우리는 콘텍스트적 의미에서 시민들의 괴로운듯한 표정과 증시 시황을 연계시켜 심상치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추정하는 것이지요.


앞의 시민들은 단순히 오늘 먹을 점심을 고르기 위해 인근 식당의 광고지를 보고 있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정반대로 주식시장이 급격히 상승되고 있는 시점을 예측하지 못해, 갖고 있는 주식을 팔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있지요. 또한 뒤의 전광판은 증시 시황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런 의미의 정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분들은 오늘 먹을 점심을 고르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진 속의 각 정보들은 모두 "사실"을 담고 있지만, 이것이 사진가가 의도한 바에 따라 다른 "진실"을 둔갑시켜 대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매우 강력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듯이, 사람들은 비언어적 직관을 통하여 감정적 차원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사진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의 주요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을 한정시키고 변형한다던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단어를 사용하여 은연중에 상대방을 평가하게 만드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콘텍스트적 의미 부여를 통해 "사실을 조합하여 진실을 왜곡"시킴으로써, 무지한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악의적 선전이 현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중 선전 수단으로써 포토 저널리즘이 득세하던 즈음, 독일에서는 불세출의 달변가이자 궤변으로 대중을 현혹시킨 파울 요제프 괴벨스(위키백과 바로가기 링크)가 등장합니다. 그는 어렸을 적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장애를 지녀, 상당히 열등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치열하게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독문학 박사학위까지 얻었으나, 때마침 1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망가진 독일 경제 탓에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소소한 잡지 기고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주변 열강(프랑스, 영국 등)에 의해 국가 경제가 유린당하고 이를 지켜야 할 기득 권력가들은 매판 자본주의자가 되어 동조하는 일이 벌어지자, 당시 사회 밑바닥에서 일었던 적극적(과격한) 청년 나치 운동에 감화되어 나치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신체 장애에 대한 열등감이 매우 심하였는지,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는 모든 공식 문서에 항상 "박사 괴벨스"라고 서명을 하였습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독일 내에서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부터 나치당의 주요 선전 전략을 기획하고 수행하며, 여러 번의 선거 끝에 나치당이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리가 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손수 창간한 『공격(Der Angriff)』이라는 명칭의 신문을 통해 상대 진영 후보를 폄훼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전국을 순회하며 하루에도 수 차례씩 거리 연설을 하며 히틀러와 나치당의 대중 인지도를 높이는데 힘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미국의 PR(Public Relations)의 아버지이자 『프로파간다』라는 저서를 쓴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비즈니스 이론을 바탕으로 대중 선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여기에 특유의 직관과 통찰로 깨달은"집단적 대중의 무지몽매함"을 이용한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왜곡시키는 수법"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세계 주요 국가의 기득 정치세력이 대중 여론을 제 입맛에 맞게 조종하는 매뉴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로 진실을 왜곡하는 기법들


괴벨스가 주로 사용했던 선전 전략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싸워 이겨야 할 여러 정적들을 하나의 이미지(유대인)로 단순화하여 대중들이 쉽게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괴벨스가 주로 공격한 대상은 자본 권력가들과 기득 정치가들, 공산당 세력이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특징을 가진 각 세력을 "유대인"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시켜, 누군가를 비판할 때에는 항상 유대인과 연관이 되도록 선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가가 뇌물을 받아 비합리적인 정책을 결정했을 때에는 그를 비난하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그랬다."고 말하거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아동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특정 종교단체"에 가면 잃어버린 아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논평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의미한 특정 종교단체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기독교 아동의 피를 빵에 묻혀 먹는다는 괴담을 차용한 것이었지요.

이 방식은 당시 독일 사회에서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마침 1차 세계대전으로 물어야 할 전쟁배상금의 부담과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금융업에 종사하며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여러 사회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비인간적이고 냉정한 경영으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다른 사회 운동가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구조적 문제에 주목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중들에게 호소한 반면, 괴벨스는 그 모든 대상을 "유대인"이라는 쉽고 명쾌한 개념으로 단순화하여 공격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사회 주류 계층(자본 세력, 기득 정치가, 언론 등) 모두를 유대인과 결부시켜 폄훼함으로써, 손쉽게 정적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효과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 민중들은 그저 유대인처럼 보인다는 것만으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두들겨 패는 일을 자행하였고, 이러한 극단적인 유대인 차별 정책은 훗날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로 발전하게 됩니다. 거기에 반하여 독일 순수 혈통인 "아리안"을 강조한 민족주의적 우상화를 꾀했으며, 우생학에 기반한 타 인종 및 장애인 말살 정책까지 펼치게 되지요.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사진가와 좋은 분위기 속에 대담을 하다, 사진가인 아이젠슈타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나서 노려보는 장면을 찍은 사진 "증오의 눈빛"


2.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묶은 단순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괴벨스의 모든 공격의 대상은 유대인으로 시작해서 유대인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아동 실종 사건의 예시에서도 유대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유대인을 타락한 민족, 악마의 형상으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회적인 나쁜 사건은 다 유대인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며, 범죄자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사돈의 팔촌이 유대인이고 그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일"이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유대인을 엮어냈습니다. (물론 그 사실은 증명된 바가 없는 거짓이 포함되었지요.)

사회의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사건들을 저마다의 영역에 맞게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파한 것입니다. 대중들은 사건의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릴 만큼 정보가 많지 않았으며, 관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매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유대인이 악마다."라는 이야기가 더 쉽게 와 닿았고 분노를 돌리기에도 편했던 것이지요.

특히 괴벨스는 정권을 잡은 이후 전국적으로 라디오를 보급하여 매일 귀가 따갑도록 나치 정권의 우수성과 유대인의 비열함을 선전하였는데 이것 또한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신문이나 연설은 1회성으로 지역적인 한계가 있었던 반면 라디오를 통한 선전은 지역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 어디든 원하는 때에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거리의 연설에서는 연설 도중에 청중의 반박으로 연설 효과가 떨어질 수 있었지만, 라디오는 집에서 소수의 가족들이 그저 화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비판자 없이 마음껏 선전 메시지를 침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이성이 아닌 감성적 차원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켰습니다.

괴벨스가 주로 사용한 언어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 감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정부가 유대인과 손을 잡고 볼셰비즘 혁명(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한 과격한 혁명)을 일으켜 토지를 모두 빼앗아 갈 것이라고 조장한다던지, 정치가들이 유대 세력과 손을 잡아 독일 국민의 재산을 약탈해갈 것이라는 등, 대중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짐승 같은 유대 자본 세력들", "비곗덩어리 자유주의자들", "당신들이 말라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같이 자극적인 문구를 써가며 상대에 대해서는 증오와 분노를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국가 정권과 사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국민들에게 통쾌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었지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서정적이고 인류애적 가치가 있음을 선전하였는데, 상대 진영의 지지자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각종 흑색선전으로 불법 행동을 자행하면서도, 이것이 유대 세력에 대해 사회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행동이라고 합리화시켰습니다.

실제 괴벨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여 히틀러와 아이들이 따뜻한 인본주의자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고, 파리 점령 후 극장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을 빈민 복지기금으로 사용한다던지 본인 스스로 폭격으로 무너진 시가지에서 직접 구호 활동을 펼치는 모습을 통해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상한 모습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히틀러의 사진


4. 아군에 대해서는 서정성을 가미한 극적(Story) 연출을 통해 영웅적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괴벨스는 각종 행사와 의례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치가 거의 알려져있지 않았던 시절, 22세의 나이에 공산당 당원의 습격으로 운명을 달리 한 "호르스트 베셀"을 국가적 영웅으로 미화하여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하여 나치당의 인지도를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베셀은 과격한 SA돌격대의 행동대장으로, 다른 나치당원과 다르게 유복한 집안의 대학 교육을 받은 인재였습니다. 그러다 집주인과 월세 문제로 갈등이 생겨 집주인이 평소 알고 지내던 공산당 청년들에게 손을 봐달라 하였는데, 마침 베셀의 악명 높은 활동에 치를 떨던 공산당원들이 숙소에 쳐들어가 창녀 출신 애인과 함께 있던 베셀을 총으로 쏜 것입니다.

베셀은 약 한 달 반 동안 사경을 헤매었는데, 괴벨스는 자신이 운영하던 『공격 』잡지에 그 과정을 특유의 작문 실력으로 기술하며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이 사건을 단순한 포주와 기둥서방 사이의 다툼으로 폄훼하고 당원을 보호하려던 공산당 세력은 여론의 질타를 받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베셀은 기득 주류 사회에서 사회를 구하고자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한 진정한 청년 영웅으로 포장되었고, 나치 청년 활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서 대중들에게 나치당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그 외에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된 후, 그토록 오랫동안 대적해 온 힌덴부르크(독일 전쟁 영웅)와 악수를 하는 장면을 통해 "신·구세대의 화해와 새로운 독일의 출발"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5. 음악과 영화, 행사 의례 등의 문화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의식적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침투시켰습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이후 괴벨스가 활동한 영역은 선전부 장관이었는데, 주로 맡은 일은 언론, 방송, 연극, 음악, 영화, 미술 등의 모든 문화 분야에 대한 관리 감독이었습니다.

괴벨스는 특히 영화 쪽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인간의 무의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영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직접 시나리오를 편집해가며, 자본주의 세력을 힐난하고 독일 병사를 영웅화하는 이야기를 주로 담았습니다.

행사에는 어떤 음악을 사용할지, 히틀러는 어느 시점에 등장하고, 연설을 마치고 내려갈 때 어떤 장면을 연출할지 수 시간을 고민해가며 직접 음악을 고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습니다. 이런 집회들은 언제나 라디오로 생중계를 하였으며, 나치당과 히틀러의 영웅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이런 기법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현대 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 진영에 대해 "종북", "좌좀"의 단어를 엮어 힐난하는 것에서부터, 선거 때마다 시장에 나가 떡볶이를 먹으며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들이 판박이처럼 닮은꼴인 것이지요.


이외에 괴벨스는 선전부 장관을 맡은 이후 언론을 서서히 장악하여 보도를 통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내는 언론사는 자금을 차단하여 고사되도록 만들었는데, 이 또한 지난 보수 정권이 했던 방송사 낙하산 인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본 글은 관련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다만 그들 입장에서, 영화나 연극 같은 문화적 장치가 그 시대와 다르게 통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일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시민 감시 권력이 등장하고, 지난 10년의 민주 정권이 이룩해 논 각종 법적 장치로 인해 함부로 시민을 해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지요. 소위 "좌파 문화주의자"라고 칭하는 문화 계통의 종사자들은, 거대한 정치권력에 맞서 정의와 상식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우리 사회를 아직까진 "사람다움이 있는 사회"로 만드는 주인공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괴벨스, 시대가 만들어 낸 괴물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벨스, 히틀러 같은 인물들을 절대 악의 범주에 두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생쥐" 같은 영화나 문학 작품들마저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선한 시민들이 거대한 악의 집단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비인간적인 순혈주의를 내세운 홀로코스트로 천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그중 유대인이 6백만 명), 세계 대전의 참화로 수억 명의 인류가 전쟁의 폐허 속에 고통받은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죄업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별개로 그 당시 사회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세출의 궤변가인 괴벨스의 선동 전략이 그토록 독일 사회에 잘 침투된 이유를 오로지 그의 역량이 뛰어나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당시 독일(유럽) 사회가 풍요롭고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면, "유대인"을 집중 공격하는 괴벨스의 선동 전략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치기 어린 젊은이가 떠들어대는 헛소리로 치부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괴벨스도 그런 극단적인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치 돌격대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도 다른 독일 지식인들과 같이 가소로운 비웃음을 보냈었으니까요.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배상금 문제로 나라 살림살이가 말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고쳐 잡아야 할 위정자들은 자본 세력과 결탁하여 제 이득만 챙기기에 몰두한 비정상적인 사회였습니다. 더욱이 1923년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그것을 기회로 돈벌이에 열을 올린 외국 자본 세력들, 그들을 비호한 정치가들과 언론 세력들,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는 대중들의 삶을 처참하게 몰아갔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할 안식처가 필요했고, 그 탓을 돌리기 위한 대상이 필요하였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와 벨기에는 1923년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독일 라인란트 지방에 군대를 진주시켜, 이에 저항하는 독일 민간인을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괴벨스 또한 독일의 기득 사회 질서에 실망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 히틀러를 만나 그가 세상을 바꿀 메시아라 굳게 믿었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지요. 히틀러의 메시아적 이미지를 전파하고, 대중의 분노를 합법적으로 "유대인"에게 돌릴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었습니다.


사실 괴벨스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사회에는 유대 자본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하였습니다. 단지 그것이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 발휘되지 못하였을 뿐이었지요.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준 나치의 등장에 대중들은 열광했고 히틀러와 나치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고, 수권법(의회가 행정부에게 입법권을 부여하는 법안, 바로가기 링크)이 통과되면서 절대 권력의 나치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 1933년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기득 자본 세력이 나치당을 이용하여 공산 세력을 물리치려는 속셈으로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였지만, 오히려 뒤통수(?)를 맞아 나라 전체 실권이 나치당에게 넘어가게 되지요.


독일의 실업자 수가 늘어나면서, 나치 정권의 지지율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20년대의 독일, 2016년의 대한민국


이 지점에서 과거 1920년대의 독일과 2016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으신지요? 아직 한국의 나치가 등장하지 않았고 실업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도 않았지만, 헬조선과 금수저·흙수저를 논하며 사회를 성토하는 청년층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의 외세 싸움에 국가 주권은 훼손되고 있으며 그 피해는 힘없는 서민들에게 전가되려 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막말 퍼레이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득 질서에 실망만 더해갈 뿐,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기득 패거리 문화가 너무나도 공고합니다. 뜻이 있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도 권력에 물들어 그들과 동화되거나, 아예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뛰쳐나오기가 일쑤입니다. 경제와 사회는 점점 위기를 향해 치닫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이들에게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이것이 1920년대의 독일과 2016년의 한국이 처해있는 공통의 상황인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혁명을 꿈꿉니다. 과거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이 그러했듯이요. 1929년의 미국 대공황이 나치 정권이 들어서게 한 방아쇠가 되었다면, 2016년 이후 어느 시점에 벌어질 세계적 공황의 시작은 사람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해 잠재의식 속 혁명의 열망을 현실로 드러낼 것입니다.


그때 과연 대중들은 누구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고 권력을 위임하게 될까요? 과거의 사례를 교훈 삼아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지만,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더 높은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대중은 언제나 무지하고 우매했기 때문입니다.


기득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 전체주의의 옷을 갈아입든, 과격하고 자극적인 혁명을 부르짖는 새로운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든, 생존의 위협에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들은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을 쫓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고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한다면, 제2의 나치(전체주의에 기반한 파시 정권)가 이 땅에 재림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대중들의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을 쫓는 습성은 제2의 나치가 득세하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개인은 현명할 수 있어도, 개인들이 모인 대중은 우매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쉽고 편한 것을 선호합니다. 이는 여론 형성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원인과 결과를 논하는 것보다는 단순하게 선과 악을 가르는 논리에 더 잘 이끌립니다. 백날 역사의 진보와 상대주의적 관점에서의 정의와 도덕, 정책의 득과 실을 이야기해봤자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대개는 자신과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한 단편적인 이익에 반응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내게 도움이 되면 정의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은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홍수에 노출되면서 진짜 사실과 왜곡된 진실을 분간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거짓은 한 순간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감추어진 진실은 복잡하고 어렵기까지 합니다. 사회가 복잡화되고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특정한 사안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지나치게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사회적 동조 현상 및 권위에의 복종, 집단을 이루면서 생기는 책임의 분산도 이에 한몫을 거듭니다. 애쉬의 선분 실험, 밀그램의 복종실험, 사회적 태만이나 방관자 효과는 적나라하게 대중 속 개인의 무지함을 증명하고 있지요. (동조 이론, 바로가기 링크)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여 전혀 비상식적인 답변을 맞다고 인정하며, 권위를 가진 사람이 비인간적인 명령을 내려도 그에 순응하여 행동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선택을 대신 책임져 줄 것이라는 의식하에 "생각의 고통", "책임의 부담"을 벗어버리는 것이지요.


애쉬의 선분 실험, 앞서 다른 사람들이 왼쪽의 선과 같은 길이의 것이 A라고 말하도록 조작했을 때, 진짜 피험자는 37%의 확률로 A가 같은 길이라는 오답을 따라 골랐습니다.


PR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혜안은 여기에서 빛을 발휘합니다. 그는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이룬다."라고 말하며, 국가 권력의 지배자는 대중이 아닌 대중의 의식 구조를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 도구(언론, 미디어, 정보기관 등)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임을 지목하였습니다.


시민 감시 권력이 등장하여 곳곳에서 지배 기득 세력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에 불협화음을 내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조작된 시민 권력을 만들고 여론을 조성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회 제도를 성취해 낼 것입니다. 이에 항거하는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조작된 물량 공세에 막혀 에너지를 소모당하여 그 생각과 뜻이 매몰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요.


더욱이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에 더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경쟁 사회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여 타인 배타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듯이, 바로 눈 앞에 닥친 생계 문제는 더 빠르고 공격적인 해결책에 손을 들어주도록 만들 것입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묘사된 것처럼, 과거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영국 시민들은 세계 3차대전과 불치 질병의 두려움으로 그들의 권력을 절대 독재자인 "서틀러"에게 양도하여 눈 앞의 편안함을 위해 미래의 자유를 포기합니다.


과거 많은 사상가들은 시대를 바꾸기 위한 방법으로 시민 계몽을 한 축 삼아 행동하였고, 지금도 많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사람들의 각성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혁명은 계몽이 아닌 대중들의 실질적 체험으로 촉발되었고, 그마저도 괴벨스의 선전 기법을 배운 기득 세력의 노력으로 대중들의 실질적 체험 마저도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실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포토 저널리즘이 왜곡 없이 사건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태생 자체가 콘텍스트적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선의를 가진 정치를 행하기 위한 권력을 얻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제도 아래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선전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마음속 한 구석에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수단이 말끔하지 못하기에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한 채, 목적이 불순한 그들에게 권력을 양도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거대한 미디어 조작에 의해 대중이 왜곡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거대한 미디어 조작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허구적인 희망일 것입니다. 차라리 거대한 미디어를 직접 손에 넣는 것, 그리고 선한 프로파간다의 방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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