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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자기주도적 삶

by 정유표
깨어있는 삶, 융통성 있는 삶


문·이과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다시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주도라는 말이 너무 광범위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까닭에, 사회적 관점에서 풀어 말한다면 “깨어있는 삶”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깨어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외골수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면 “융통성 있는 삶” 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지는 나의 주관을 가지고, 타인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되,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며, 특정한 사상이나 대상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지금까지 공동체를 중심의 조직 질서를 강조하였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하 관계를 습득하였습니다. 가정이든 회사든 나보다 위인 사람과 아래인 사람으로 나누었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행동 역할이 정해졌습니다. 물론 조직은 여러 사람이 모여 협동하며 존속되므로 조직 내 위계 관계는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한 번 정해진 상하 관계를 영속적이고 불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부하인 사람을 회사 밖에서도 부하인 것처럼 대하고 부려먹습니다. 업무적으로 아래인 사람을 인격조차 아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손 아랫사람은 그런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만약 그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면 회사 내 따돌림을 당하고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이런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군대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는 특수 조직이기 때문에 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라도 상급자의 명령에 의문을 품거나 항거하지 않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6·25 이후 기업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조직 문화의 상당 부분을 군대의 것을 차용하였습니다.


체계화된 기업 문화라는 것이 전무하던 시절, 일을 명령하고 처리하는 절차를 만들기 위해 일본이 남기고 간 군대의 조직 체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대 특유의 극단적인 상명하복 문화까지도 흘러 들어왔고, 한국 고유의 집단주의 성향과 어우러져 지금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군 장교 출신의 취업자들은 장교 입사 전형을 따로 채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군대식 문화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명하복 문화는 교육 시스템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었습니다. 선생과 제자가 학습 내용을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선생이 알려주는 지식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사회화가 부족하여 법과 질서를 배워야 하는 시기의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이 깨어나서 사고해야 할 사춘기 이후에도 상명하복의 방식으로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책을 보고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외우는 암기식 학습도 그 맥을 같이합니다.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교과서 지문을 읽을 때 마치 선생님이 알려준 것처럼 스스로의 판단 없이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에 있는 그대로를 외워서 학습하는 학생은 ‘사과’는 오로지 ‘과일’이라는 생각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이를 응용하여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저학년부터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대상뿐만 아니라 권리, 의무, 정의, 사상 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학습하게 되는데 그런 개념 조차도 무비판적 암기식 학습을 한다면 그 폐해는 심각해집니다. 이때 배우는 내용들은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한 기초 지식을 쌓는 단계입니다.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대상으로 하며, 더 중요한 목표는 교과서의 지식을 활용하여 책 보다 훨씬 더 복잡한 진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신봉했던 천동설이 갈릴레이의 지동설로 교체되었고,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던 방사능 원석들이 몸에 무척 해로운 물질이라고 밝혀졌듯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류의 지식 발전과 변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30년 전이었다면 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형화된 지식만 활용해도 일생을 유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년만 뒤쳐지더라도 더 이상 시대에 적응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들의 생각에 따라 휩쓸려 살아가거나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국내의 중·고등 교과 과정도 마냥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적 흐름에 맞추어 융합적, 창의적 인재 양성 정책들을 추진하였고, 과목 통합적 문항으로 출제하는 수능 시험, 입학 사정관 제도, 융합형 인재 교육(STEAM) 제도, 집중이수제, 자유학기제 같은 제도들이 그 일환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장 실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여주기 식 정책 추진은 일선의 교사들과 학생 학부모만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여전히 학생들은 단순 외우기 식 공부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으며, 대학에 가서도 교수가 알려주는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외우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진출해서는 내가 생각하여 일을 하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대로만 일을 하는 인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리해보면 주도적인 삶이란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에서부터 ‘나의 주관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지식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습관’을 바탕으로 훈련되는 것입니다.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명제를 보았을 때, ‘사과는 과일의 용도만 있는 것인가? 향기롭고 보는 것으로도 아름답진 않은가?’와 같은 사유를 통해 ‘사과는 과일이지만 장식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지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과정의 일례이며, 바로 현대 사회가 원하는 창의적 발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이며, 복잡하고 급변하는 사회를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외골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당면한 문제에 귀를 닫고 회피하지 않도록 할 것이고, 숲과 나무를 조화롭게 살펴보며 적절한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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