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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Nov 08. 2016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흔히들 하는 말은 보편적 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올해 초에 세웠던 내 계획은 이렇다.



근 몇 년 동안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적은 없지만 2016년에는 성실하게 일을 하자라는 생각이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20대 후반이 되었고, 이제는 결혼이든 여가든 나중에 할 무언가를 위해 1년 동안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많이 모아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2016년이 비록 두 달 남짓 남긴 했지만 12개월 중 직장에서 일을 한 시기가 5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심지어 12개월 중 2달은 동남아에서 2달은 유럽에서 지냈다.

평생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같은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고, 해외 출장의 업무를 맡아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4개월이나 한국 밖에서 살았다.



2016.02 캄보디아 씨엠립



올해 1,2월 겨울을 났던 캄보디아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아른아른 한 인생 나라라서 나중에 따로 글을 작성하고 싶다. 매일 발물레를 돌려서 도자기 만들고, 먼지 나는 길을 걸어 라떼아트를 하러 갔던 하루하루는 인생에 관한 지금의 내 가치관에 영향을 줬던 첫 번째 시기가 아닌가 싶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로 한 순간에 백수가 되는 일도 있다.




정신없던 8월 중순의 상황은 이렇다.



화요일 여름휴가에서 돌아와서 수요일 회사에 사표를 냈고, 목요일 베를린행 비행기 표를 샀으며, 금요일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탈탈 털어 환전을 했고, 토요일 짐을 싸서 일요일 출국했다.


불과 5일 만에 일어난 신변의 급속도 변화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면 솔직하게 도피했다고 대답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하기가 싫었다.



평생 머물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기에, 언제라도 다시 이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조건을 조율해서 새로운 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빡빡한 일정을 조금 뒤로 미뤄두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면 주위 사람들에게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한 선택을 납득시키고, 위로를 받는 것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생활의 힘듬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같이 욕을 하고, 운동도 다녀봤지만,

결국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스스로 온전한 상태에서 마음을 잡는 과정이 필요하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도 세상에 마음을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고 괜찮은 일은 없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유럽 여행은 기회라고 봐야 할까.




베를린으로 도피를 하긴 했는데, 분명 2016년 내 계획에 유럽 여행이 있지 않았기에 일정을 짜기도, 돈을 모으지도 않았다. 다만 결혼하기 전에 유럽을 한번 돌아봐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막연히 '스위스에 가보면 좋겠다'라는 희망 사항은 있었다.




그래서 스위스를 시작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독일을 도는 여행을 했다. 그리고 에어비앤비로 렌트한 베를린 집에 머물면서 1달 넘는 기간 동안 베를리너 코스프레를 했다. 매일 아침 요새 핫하다는 유기농 브런치 가게에 가서 브런치를 즐기고 밤에는 클럽을 가보기도 했고, 물 마시는 것처럼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다.






MINIMAL LIFE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될 줄이야.




출국 전 한국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과잉 그리고 과잉이었다. 시간 있을 때 미리 사둔다는 명목 하에 넘쳐나게 사서 쟁여 둔 물건들과 그것들 사이에서도 부족함을 느꼈던 불만족의 나날이었다.

매일 아침 입을 옷을 고를 때도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지의 부족함을 투덜거리는 일상이었달까.




베를린에서 매일 아침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캐리어에 있던 10벌 남짓의 옷이었고, 다른 베를리너들이랑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옷을 날씨게 맞게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한국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면서 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그 주에 내가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양만 마트에서 장을 봤고, 캐리어의 짐이 많이 늘어나면 안 되기에 꼭 필요한 아이템만 구입했다. 백수이기에 0.1유로까지 가격 비교를 해가며,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재화와 그것이 주는 가치를 생각해가며 소비를 했다.






매일 내가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하루를 보냈나 곱씹어보며 잠이 들었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라는 생각보다 일과 사람을 떠나 온전히 '나'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했다.





2016.08 독일 베를린





당장 내일 죽어도 다 쓰지 못한 게 있어서 아쉽거나 하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에 충실한 삶이었다.   




그렇게 27살의 여름, 가을 나는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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