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A Jan 22. 2018

내가 만났던 리더들.

직장 생활 시리즈




 내가 그와 일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그의 좌우명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Stockdale Paradox 스톡데일 패러독스'

비관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이중성. 낙관적 현실주의 혹은 합리적 낙관주의라고 불린다. 일반적인 낙관주의가 현실의 문제들을 간과하고 무조건적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반면,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현실에 대한 비관론적 관점을 잃지 않는다. 최고의 결과를 바라되, 최악의 상황을 예상한다는 것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그의 회사가 잘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였을까. 회사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위기는 회사의 존폐가 달린 커다란 위기였지만, 그에게는 최종 성공을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작은 시련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처음 시작한 회사는 젊은 스타트업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함께 으쌰 으쌰 해서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회사 말이다. 그는 항상 직원들을 먼저 챙겨주려고 노력했고, 그 때문에 본인이 가장 고생하면서도 가져가는 게 없다고 들었다. 그가 정말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렇게 운영한 회사가 망하고 나서 그 경영 방식을 버렸던 건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





 그의 장점 중의 하나는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그는 디자인 전공자도 아니었고, 남자였고, 성격이 섬세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작성한 제안서를 볼 때마다 그는 나에게 PPT 디자인부터 폰트체와 크기, 이미지 순서까지 피드백을 줬다.(참고로 나는 기획자다.) 원래부터 디자인 감각이 있었던 것인지, 일을 위해 디자인 감각을 키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래서인지 그의 회사는 홈페이지, 로고, 명함 디자인 등이 항상 뛰어났다. 심플하면서 세련된 디자인 때문에 회사 자체가 깔끔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와 함께 일을 하기 위해 나도 디자인 공부를 했었다. 그가 추천 한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북'이라는 책을 사서 사무실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 디자이너에게 '폰트 한번 바꿔보자. 이미지 이거 말고 다른 거 없어?'라는 피드백보다 더 구체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보이는 부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니 회사 PR을 제안하는 것도 쉬웠다. 클라이언트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PR의 방향성도 그의 머릿속에 미리 그려져 있었고, 그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일을 시킬 때 적절한 부담감을 줬었고 그것이 그 일을 잘 해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었다. '이런 이유로 이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당신의 기존 업무 성과를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이 일도 틀림없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일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그 일을 잘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은 심리와 비슷하다. 현재 다른 업무가 많아서 부담이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신 인원 충원과 같은 지원을 해주겠다고 덧붙여 주면, 새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는 한 가지 일을 끝낼 때마다 잘했다고 이야기해줬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준 만큼 본인도 일을 했다. 혼자 주말에 사무실에 나와서 일하고는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그와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는 일은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은 되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게 프로세스를 짜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보통의 리더는 이런 고민을 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기 싫은 일'을 본인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은 나이지만 배울게 많았다고. 한 일화를 예로 들었다. 어느 날 두 직원 사이에 큰 말다툼이 나서 한 직원이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가 남은 한 직원에게 싸움의 원인을 묻거나 결과를 질책하는 대신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웠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 그를 더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것 같다.




 그의 커다란 문제점 중에 하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진행하려는 성급함이었다. 일의 순서와 상관없이, 성공을 위해 필요해 보이는 모든 것을 일단 조금씩 건드려 놓는 것이다. 이를 테면 제품이 출시돼서 판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제품이 완성되어야 하고, 법적인 인증 절차, 임상 시험, 개발 보완 등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는 회사 내부에서 이 과정이 함께 논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품의 마케팅, 판매처 확보를 위한 미팅을 다니느라 바빴다. 제품 개발 현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일하는 내용을 보았을 때 나는 제품이 곧 출시되는 줄 알았다. 더 나아가 당장 회사에 필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도 우선 데려와 사무실 책상에 앉히고 싶어 했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있어도 나뉜 역할을 중심에서 모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리더의 역할은 사람을 영입하는 일에서 한 단계 발전해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다가도 걸려 오는 업무 전화를 받으러 나가거나, 본인도 수시로 업무 전화를 거는 타입이었다. 특히 회사 직원들과 함께하식사자리에서는 일부러 더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는 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열심히 일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직원들도 그렇게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식사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유치하지 않냐는 다른 대표님의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져가는 월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일할 수가 있겠냐고. 다른 사람들이 본인만큼 일하기를 바라는 리더는 욕심이 많은 것이다.





 일요일 그가 물건을 가지러 잠깐 사무실에 들렀는데 한 직원이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이 직원 참 예쁘다. 주말에 혼자 나와일하더라.'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또 되지도 않는 소리 하는 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나중에 한 직원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표님이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사람들을 비교해서 기를 죽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은 행동을 유도하면 오히려 일할 맛이 떨어진다고. 맞는 말이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점이었다. 말을 잘했고, 임기응변에 능했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질문을 해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일을 배울 때는 그가 말을 잘 하는 것이 부러워서 그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같이 미팅을 가면 핸드폰 녹음기를 켜서 그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녹음해두고 이동할 때마다 따라서 말해보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내부 직원들에게 엄청난 독으로 돌아왔다. 클라이언트에게 '이 부분은 그냥 해드릴게요.'라고 그가 뱉어 버리면, 직원들이 그 일을 해주기 위해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건 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쳐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그 실무를 하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니까. 실무를 해보지 않은 리더는 본인이 주는 업무의 양을 모른다. 아무리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해도 도저히 안 되는 일이 있다. 소재의 매력도에 비해 목표 성과가 지나치게 높거나, 지원되는 예산이 터무니없이 적은 경우가 그렇다. 이런 일을 '그냥 해'라고 이야기하거나, '네가 이 정도도 하지 못하면 이 일 때려치워야지'라고 이야기하면 업무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일이 하기 싫어지는 순간 직장은 끔찍한 장소가 된다.






 회사 안에 붙어있는 것을 꺼려하는 리더들이 있다. 함께 회의를 하고,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것보다 나가서 미팅이나 접대를 하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내부 직원들이 본인 없이도 일을 잘 할지 불안하지만, 그것을 본인이 관리할 자신이 없으니 보지 않는 곳으로 제쳐두는 것이다. 그는 전체 회식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직원들끼리 술자리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회사에 대한 어떤 불만이 나올지 전전긍긍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피드백을 들을 용기는 없으면서 말이다. 다혈질이었던 그는 클라이언트와의 껄끄러운 미팅, 이를 테면 계약 파기 같은 미팅에서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너무 싫어했던 나는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로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지 못하게 된 나를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난다.


 










 그때는 내가 예전 회사 직원들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였다.



우연히 거래처 대표님과 둘이서만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십 년 넘게 회사를 꾸려오신 분이셨는데, 다정하면서도 강단 있는 성격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회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실속 있게 유지되고 있었고, 연륜에서 나오는 깊은 인사이트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며칠 전에 그분이 믿던 회사 직원이 거래처와 몰래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무런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겠다 싶어서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여쭤봤다.



"대표님은 직원들에게 배신당하거나, 상처 입었을 때 어떻게 대처하세요?"



그분은 갑자기 지갑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면서 되물으셨다. 아무리 구겨지고 때가 묻어도 지폐의 가치는 변하지 않냐고. 마찬가지로 사람들에서 상처 입고 다쳐도 나 자신이 온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또 당했구나. 아직도 부족하구나. 그렇지만 내가 아직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많은 위로가 됐었다.




 세상엔 다양한 유형의 리더가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떤 대표님은 사람 대 사람으로 감정적인 유대를 쌓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신다. 클라이언트를 처음 알게 되면 먼저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그의 고충을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들어주면서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영업적인 부분은 그 후의 이야기이다. 신기하게도 클라이언트들은 그 대표님한테 무한한 신뢰가 생겨서 개인사를 털어놓기도 하고, 회사의 여러 가지 부분을 다 맡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너무 바빠진 그분은 1분에도 수십 통씩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한 가지 일을 느긋하게 처리하실 시간이 없으시다. 중요한 일은 기약 없이 지연되기도 하고, 피드백을 기다리느라 나의 퇴근이 늦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항상 느낀다. 리더도 사람이다. 그들은 절대 완벽하지 않다. 실수하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도 한다. 내가 한 때 같이 일하고 싶은 리더를 찾을 때 따지던 3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하고. 셋째,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한비자가 한 말이다.












 글쓴이 한 마디 >> 


 오랜만에 직장 생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제 브런치를 새로 구독하시는 분이 늘어날 때마다 그분의 관심작가 목록을 클릭해서 보고는 합니다. 그중 대부분은 역시 브랜드/스타트업/디자인/컨설팅 등 각종 '일' 관련 글을 쓰는 작가분들이 신 거 같아요. 부끄럽게도 저도 1년 반 전에 끝낸 회사 생활에 대한 글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출근길에, 혹은 사무실에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이번 주 한 주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퇴근하시고 핸드폰 오래 하지 말고 주무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 생활을 추억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