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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Jul 07. 2018

내가 포기한 직업들

시도해 볼 용기가 없었던 걸지도.


 룸메이트 동생과 거실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아는 사람'이야기가 나왔다. "나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사는 사람 있어.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런 일을 한다고 하더라고." 이런 이야기 말이다.






 동생과 함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선배 중에 유럽에서 여행 가이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자 친구와 함께 프라하에 살고 있는 그 선배의 일상 사진을 보면 진짜 행복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프라하라.. 이름부터 낭만이 터져 나오는 도시에서 산다니 듣는 것만으로도 부러운 마음이 솟구친다. 생각해보니 나도 캄보디아에서 지낼 때 나중에 한국에서 할 거 없으면 여기서 가이드나 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한국인 관광객 그룹에게 앙코르왓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아저씨의 모습에 내 모습을 대입해보았다. 현지인과 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다 겪고, 꽤나 익숙해진 현지 말로 매표소 직원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1) 여행 가이드 직업으로 삼으면 어떨까. 여행하는 것이 주요 업무니 일 자체는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이드가 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다른 나라 역사를 외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의 역사를 정확히 외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생판 모르던 곳의 역사를 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수많은 암기 시험으로 단련된 뇌가 한번 더 역할을 해준다고 가정했을 때,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체력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이 다음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 그동안 만났던 여행 가이드분들은 항상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안색에, 원래의 음색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쉬어버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우고, 발성을 바꾸면 이 문제는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들이 심심해할 때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유머 감각이 필요할 것 같다. 컬투쇼에 나왔던 베스트 사연이라도 노트에 적어서 외워놔야 할까. 한 가지 다행인 건 무언가를 꼼꼼하게 챙기거나, 나이 드신 분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는 것. 이 정도면 업무 적합성은 조금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가이드'라는 직업을 조금 더 친근하게 느꼈던 계기가 있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할 때 이용했던 마이 리얼 트립이라는 서비스 덕분이다. 이 웹사이트에는 여러 가이드들이 자기만의 투어 컨셉과 일정을 웹사이트에 올리고, 신청자들이 모이면 투어를 진행하는 방식이다.(혹은 본인에게 맞는 여행 일정을 짜주기도 한다.) 이 서비스의 가이드로 선정되면 일반인들도 누구나 여행 가이드로 일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외국에 오래 거주하고 있는 학생이나 프리랜서분들이다. 그래서 일반 여행사보다 투어 일정이 가볍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이를테면 간단한 밤거리 워킹 투어나, 맥주 양조장 투어, 스냅사진 투어 같은 것들이다. 또 같은 여행 장소라 하더라도 진행하는 가이드 별로 투어 코스가 달라, 자신이 좋아하는 투어를 선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이드 분들 중에는 손수 싸온 김밥을 점심으로 나눠주거나,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바로 프린터기로 인화해주시는 분도 있다. (여담이지만, 가끔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은 내가 전공 서적에서 수 없이 많은 이론으로 공부했던 USP(Unique Selling Point) 같은 개념의 필요성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이미 적용하고 있다.) 나도 외국에서 오래 살게 되면 이 일로 부수입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만의 컨셉을 고민해보기도 했다. 꽃이나 책, 타탄백 같은 소품을 가지고 다니면서 인스타 업로드용 사진을 찍어줄까. 당일 3곳 이상 요새 핫한 클럽 투어는 이런 걸 해볼까? 예쁜 풍경이 담긴 여행 사진에 캘리그라피를 써주는 건 너무 무난할까.











 캘리그라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손글씨 쓰는 것을 즐긴다. 어렸을 적부터 꾸준한 필체를 유지해오고 있는데, 그것이 독특하거나 예쁘다기보다 컴퓨터 폰트처럼 일정한 편이다. 그래서 캘리그라피가 한참 유행하던 때 2) 캘리그라퍼가 내 천직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제대로 배워보기 위해 클래스를 듣거나, 동호회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카페에 모여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똑같이 따라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인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하고 싶을 때, 종이 캔버스에 캘리를 써서 선물하고는 한다.(솔직히 말하면 온라인 수업을 수강해서 딴 캘리그라피 지도사 자격증 같은 것도 있다.) 그런데 아직 나만의 글씨체 혹은 컨셉이 없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이미 자기만의 컨셉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 만년필 글씨만 쓰시는 분도 계시고, 영문 캘리그라피 전문, 직접 그린 수채화 그림이나 드라이플라워로 꾸민 작업물을 만드는 분도 계신다. 포화된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수입을 감안할 만큼 그 일을 좋아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좋아했다면, 이미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만 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나의 커다란 문제점 중에 하나다. 다양한 것들을 좋아하는 데, 어느 것 하나 미칠 만큼 좋아하는 것이 없다.



 한 가지보다는 여러 가지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꼭 그것을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클라이밍, 폴댄스, 서핑, EDM요가, 롱보드, 우쿨렐레 모두 유행하기 전에 먼저 찾아서 한번 이상 배우러 다녔다. 취미 생활에 관한 글(의미 있는 삶을 찾기 위한 노력)에 썼던 것처럼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도자기 만들기, 사진 찍기, 드로잉, 뜨개질, 가죽 공예, 꽃꽂이, 캘리그라피를 같은 것들을 주말마다 번갈아 가면서 했었다. 생각해보면 대학생 때부터 무언가 새로운 문화생활, 해보지 않은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것에 시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3) 피키캐스트 에디터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무언가를 먼저 경험해보고, 그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원해보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재미를 최우선으로 하는 미디어의 성향이 내가 지향하는 콘텐츠의 톤 앤 매너와 차이가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로 돌아가, 내가 장래희망으로 어떤 직업을 꿈꿨는지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4)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떠오른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미래의 내방' 구조도가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가구나 데코레이션 소품이 많이 발달됐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방의 구였다. 부피가 큰 침대와 책상의 배치를 먼저 생각한 뒤 나만의 특별한 공간을 그렸었다. 예를 들어 감자칩을 먹으면서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 테이블과 아이돌(신화) 화보를 모아서 붙여 놓은 한쪽 벽 같은 것들 말이다. 심심할 때마다 A4용지에 자를 대고 배치도를 그린 뒤, 가구들을 옮겨서 실현시켜보고 동선이 안 맞으면 도면을 수정했었다. 적어놓고 보니 딱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다. 내부 환경을 기능과 용도에 맞게 설계하고 장식하는 일. 고객의 이야기를 듣고 동선, 색채, 조명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가구까지 선정한다고 한다. 한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하나의 작품을 하는 셈이니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이 상당하겠지. 어린 시절의 내가 그때의 좋아하던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지금 나는 CAD를 잡고 있었을까?   









  요새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면서 '이럴 거면 그냥 계속 그림이나 그릴걸'이라는 생각도 한다. 꽤 오랫동안 미술 학원을 다니면서도 3) 화가(요새는 아티스트라고 해야 할까)를 직업으로 꿈꿔본 적은 없다. 그 직업은 먹고살기 힘들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어린 시절부터 인지했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정해진 업무 일과가 없는 것도 불안했지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예술하는 딸을 지원해줄 만큼 여유로운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한 번쯤 부모님과 상의를 해봐도 괜찮았을 텐데,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남들보다 월등히 우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지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단 한 명의 화가만 있어야 하는데. 실력보다 '본인만의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보라고 한다. 특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에는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고(멀지 않은 곳에 밴쿠버 출신 유명 여류 화가 '에밀리 카'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예술 대학이 있다. 마치 학원처럼 등록하면 바로 수강할 수 있는 클래스도 많이 연다고 한다.), 손으로 하는 작업물에 대한 값을 많이 쳐주는 환경이라는 이유다. 여기서 나는 또 생각한다. 과연 지금 상황에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정말로 시도했다가 좌절하거나, 싫어하게 되면 어떡할 것인가. 이런 것이 정말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주는 정서적인 안정감은 일상에 지쳤을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 고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렇게 되묻는다. 왜 그때의 나는 조금 더 도전해 볼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까.




 






 일찌감치 포기했던 직업 중에 4) 아나운서 도 있다. 계기는 초등학교 때 복도에서 어떤 언니가 내 목소리를 듣더니 '얘 진짜 목소리 예뻐'라고 말하며 친구들을 불러모았던 일화였다. 그 한마디에 '정말 그런가? 그럼 커서 아나운서를 해야 하나?' 진지한 고민을 했었다. 나중에야 아나운서는 예쁜 목소리 톤 보다 듣는 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중저음의 톤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업무 미팅을 할 때 나오는 밝은 톤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회사를 다닐 때는 프레젠테이션 하는 일을 제일 좋아했다. 무대에서 마이크를 들고 내 목소리로, 내가 기획한 내용을 시각화시켜서 발표하는 일이 너무 좋았다. 사실 대학생 때 많은 공모전에 참가했던 이유도 본선에 올라가면 프레젠테이션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감정을 싫거나 강세를 두는 연습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가장 처음에 'PT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건 학부 선배였는데, 완벽한 성격의 그는 내가 한 문장 내의 억양, 속도, 숨을 고르는 시점을 정확하게 따라 해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게 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대학교 1학년 학술제 발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됐었다. "고등학교 때(3초↗) / 당신의(2초↘) / 가장(1초-) / 큰(1초-) / 고민은(2초↘, 잠깐 정적) / 무엇이었습니까?(3초 -↗-)" 학부 과정 내내 발표를 위해 PPT를 만들고,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연습하면서 수정하는 일은 항상 재밌었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말과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외국에서 서빙 일을 하는 지금은 미래의 직업 후보를 몇 가지 생각해본다. 유망한 것 중에 5) 한국어 튜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캐나다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한국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이들은 보통 회화책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기초를 배운다. 문제는 이들이 기초 단계를 넘어 중금 과정을 배우고 싶을 때 캐나다 내에서 배울 수 있는 클래스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친구 중에 얼마 전에 한국에 2달 동안 머물면서 한국어 어학원을 다닌 친구가 있다. 어학원 과정을 끝내고 한국어 회화 중급 과정 수료증을 받아왔지만 실제로 그 전보다 회화 실력이 늘은 것 같지 않다는 불평을 했다. 어학원 교재를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인들도 헷갈리는 단어를 구별하고 맞추는 문법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한국어 중급 과정 수업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더 원활하고 풍부한 의사소통이지 문법이 아니다. 친구의 교재를 보며 실제 회화에서 사용하는 한국어를 설명해주다가 외국인의 입장에서 배우고 싶은 한국어 콘셉트의 학원을 내가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어, 외국인들이 자주 하는 한국어 실수를 모으기만 해도 공감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초반에 교재를 독자적으로 기획하고, 커리큘럼을 짜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겠지만 먼 미래를 봤을 때 이보다 바람직한 직업이 없는 것 같다. 룸메이트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HANA KOREAN COLLEAGE'를 차리라고 한다. (이곳의 학원들이 조금만 규모가 커도 Academy 대신 Colleage 단어를 붙이는 걸 비꼬아서 말하는 말이다) 그렇게 다시 또 다른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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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문득 생각나서 서랍에 넣어놨던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을 주제로 쓴 글이었는데, 생각보다 플로우가 잘 나오지 않 완성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정도를 유지하려다 보니 더 어려웠지만,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다시 회상하는 계기가 되어서 기쁩니다. 아마도 다음 글은 와인에 대한 글이나, 한국에 대한 글이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빨리 써지는 글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 여름밤의 낭만은 테라스에서 마시는 온 더 락에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좋은 분들과 함께하는 시원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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