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영의 ‘소녀’라는 짧은 수필이 있다. 열네 살 먹은 소년 ‘나’가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 집에서 만난 열세 살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안채에 들어 앉아 점심 대접을 받게 된 ‘나’는 벽모서리에 걸린 소녀의 분홍 적삼을 보고는 야릇한 호기심에 빠지게 된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적삼…. 적삼을 치우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소녀는 적삼을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워 다른 방에 숨어 있다가 작별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로 숨어서 ‘나’를 배웅하고 만다.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이었을까 싶으면서도 달아오른 소녀의 빨간 두 뺨을 생각해 보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소녀의 그 수줍음이 그립다.
그땐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부끄러울 일들이 참 많았다. 합주 시간에 혼자 한 박자 늦게 친 탬버린 소리에도 얼굴이 빨개지고, 운동회날 먼저 달리기를 끝낸 남자 아이들이 결승점에서 나의 가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밤톨만한 가슴이 티셔츠 위로 불거져 나오는 것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교복 깃에 살짝 묻은 땟자국이 부끄러워 온종일 마음이 그곳에만 머물러 있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닌데. 그런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세상 탓인지 부끄러워 할 일에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참 뻔뻔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이 탓인지 세상 탓인지 부끄러움이 사라져
큰아이가 중학교 다닐 시절, 잠깐이긴 했지만 엄마 아빠의 속을 썩인 적이 있다. 사춘기를 겪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이의 고민을 들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나쁜 친구와 어울려 다녀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 아이만 떼어놓으면 될 거란 생각에
“너, 그 아이랑 만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마.”
정말 엄마로서 부끄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그 아이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일 텐데 마치 그 아이가 악마라도 되는 듯 미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불과 몇 달 후 딸아이는 평상심을 찾았고 마음 속에 일고 있던 질풍도 잦아들었다. 이미 머리가 굵어진 아이에게 모범생 친구하고만 놀고 그렇지 않은 친구랑은 놀지 말라고 무식하게(?) 말했던 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도 난 부끄러운 엄마였다. 소방서 견학도 하고 훈련 모습도 참관하러 갔던 아이가 친구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아서 잘 볼 수가 없었다며 울상이 되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 제자리에 앉아서 보라고 했는데 앞자리 아이들이 모두 일어서는 바람에 뒷줄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느라 서로 다투어 너도 나도 일어섰을 텐데 우리 아이만 그 가운데 앉아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쪼그리고 앉아 고개만 이리저리 애타게 굴렸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속이 상하고, 그 융통성 없음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바보같이 왜 그러고 있었어? 그럼 너도 일어나서 봤어야지.”
하고 말았다. 규칙을 어긴 친구들이 옳지 못했다고 가르쳤어야 하는데…. 이 역시 나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하다?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주인공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영어학원, 수학학원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세상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소녀들 속에 분홍 적삼에 묻은 곤때가 수줍기만 한 소녀의 모습은 없다.
어린 제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교사, 파렴치한 정치인, 외국인노동자의 등을 치는 악덕기업가, 논문 표절로 구설수에 오르는 학자, 부모를 버리는 자식, 자식을 죽이는 부모, 인정도 의리도 저버리고 실리만을 따지는 사람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 인간성이 슬프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