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향 May 12. 2020

이도령과 향단이

                  - 침묵군과 수다양 이야기

 7년의 연애와 27년의 결혼 생활. 내 인생의 절반을 넘게 그와 함께 살았다. 돌이켜 보면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는, 극장도 목욕탕도 없는 산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유학 온 촌뜨기인 나와는 물건을 고르는 안목에서부터 식성, 취미, 성격까지 참 많이 달랐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결혼을 하여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여 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의 혈액형이 나와 똑같은 A형이란 것이 의외일 정도로 그와 나는 많이 다르다. 그는 혼자 조용히 책읽기를 좋아하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굳이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꼭 필요한 말'이라는 것도 자신의 판단으로 내려지는 것이다 보니, 가끔은 꼭 해야 할 말인데도 침묵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침묵씨’이다. 


 피자를 밥처럼 먹을 수 있는 그와, 한번 먹어보라고 누가 권하면 한 조각 맛이나 보는 나는 식성도 많이 다르다. 카레만 해도 그렇다. 중학교 요리실습 시간에 처음 맛본 카레 맛에 반해 나는 지금까지도 마니아가 되어 있다.

 어느 날, 카레를 밥 위에 듬뿍 얹어 신나게 비벼대는 내 앞에서 그의 수저는 김치 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왜 오늘 카레가 맛이 없어요?"

 돌아온 그의 대답은

 "나 원래 카레 잘 안 먹어."  

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는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싫다, 좋다' 말 한 마디 없이.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굳이 싫어한다고 밝힐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옷 하나를 골라 입어도 그는 세련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조금은 촌스러운 옷을 골라 입는다. 분명 뭔가 다르다. 

       <고흐가 걷던 산책길을 함께 걸으며, 2019. 1>

 이런 우리가 어찌 만나 부부가 된 것일까? 

 선배언니와 그와의 사이에 낀 나는, 처음에는 분명히 '향단'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향단이가 이도령을 만나 결혼한 셈이랄까. 물론 향단이가 욕심이 나서 도련님을 유혹한 게 아니라 - 물론 그런 주제도 못 되지만 - 도련님이 먼저 향단이를 제 짝이라 여기고 변심한 것이니 향단이를 탓하진 마시라.

 하지만 가끔 서로 다른 성격 탓에 힘들 때는, ‘그때 이도령을 만날 게 아니라 방자를 찾았어야 했는데.' 싶을 때도 솔직히, 있다!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 온 너무 다른 종(種)이란 책을 오래 전에 읽었다. 서른 해 가깝게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며, 한 이불을 덮고 똑같이 생각하며 다툼 없이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 같다.   


 

  <살티성지 앞 벚꽃길, 2020. 4>

 

 소설 같은 스토리로 이십 대를 보내고,

서로 다른 성격 속에서 상처 받고 상처 주며

폭풍 같은 삼십 대를 보내고,

이제 우리는 사십 대를 넘어 오십 중반에 와있다. 


 세월 덕분이리라.

 다른 별에서 온 남녀가 조금씩 닮은 기쁨과 슬픔을 찾아간다. 

 큰아이 채영이의 열병에 '함께' 밤을 지새웠고 둘째아이 채원이의 첫걸음마에 '함께' 감동했으며,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이겨냈다. 분명히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인데 어느 새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우리의 마지막 날에 옆을 지켜줄 이가 누구인지. 아직까지 같이 사는 걸 보니 계속 같이 살겠다는 점쟁이의 말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인정하며 사는 법, 조금씩 양보하며 사는 법, 지면서도 이기는 법을 세월에게서 배운 덕분이리라.  


 인생은, 속으며 사는 거란다. 속지 않으면 못 산단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 시간이 좀더 지나면 나아지리라.'며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것이 인생이란다. 속고도 또 속을 줄 아는 것이 인생이란다.

 우리 침묵 씨(氏)가 수다 양(孃)에게 물들어 함께 수다를 떨어줄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오늘도 또 한번 속아본다.   

  "오늘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조잘조잘."

  "5층에 용민이네 이사 간다는데……조잘조잘."

 30분에 한 번씩 '응'으로 돌아오는 침묵 씨(氏)의 메아리에 만족하며 오늘도 수다 양(孃)은 백 점 맞은 아이처럼 재잘거린다.


 '어쩌겠어, 이제 와서 이도령을 방자 만들 수 없으니.'


<채영, 채원이의 선물 - 2020. 5 어버이날>
매거진의 이전글 쪽지공주 16년만에 다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