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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May 13. 2020

파도, 바람, 그물 걷는 소리,  뭇별 반짝이는 소리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낯선 동네의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보는 것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작은 갤러리를 발견했어요. 무엇보다 제 시선을 사로잡은 건 ‘네루다의 시처럼’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방학이면 어김없이 역마살이 뻗쳐 몸이 근질거립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네루다의 나라 칠레입니다. 그곳은 내 평생 죽기 전에 꼭 한번,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 Someday - 란 말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때이기에 좀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단어입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우편배달부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입니다. 세계적인 저항시인으로 불리기도 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제가 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잔잔한 감동과 여운, 깊은 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이미 책이나 영화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저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좋아합니다.  


 네루다는 산티아고에서 120Km 떨어진 작은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에 살았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을 즈음이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의 편지가 그곳으로 날아듭니다. 직원 한 명 없는 우체국의 국장은 밀려드는 네루다의 우편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 겨우 글만 읽을 줄 아는 순박한 마리오를 네루다의 우편물만 배달하는 전속 배달부로 고용하게 되지요. 단 한 사람을 위한 우편배달부인 셈입니다.


 수취인과 배달부, 네루다와 마리오는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로 탄압을 받던 네루다가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지중해의 코발트빛 파도가 찰랑거리는 나폴리 근처의 작은 섬에서 마리오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마리오는 네루다가 많은 여자들에게 편지를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부러워하기도 하고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에게 읊어줄 시 한 구절을 부탁하기도 하는 철없는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네루다의 시를 읽고 대화를 나누며 변해갑니다. 네루다와 우정을 나누며 무한한 은유(메타포)의 세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할 줄 아는 청년이 되어 갑니다. 


 해변을 거닐며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기대여 바람소리를 듣고,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나가게 됩니다.


 네루다의 도움으로 마리오는 짝사랑하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게 되지만 네루다는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떠난 네루다를 그리워하며 마리오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녹음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습니다. 네루다를 위해 그가 그리워할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담습니다.


 그것은

작은 파도소리,

큰 파도소리,

절벽을 쓰다듬는 바람소리,

풀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걷는 소리,

신부님이 치시는 성당의 종소리,

밤하늘 뭇별이 반짝거리는 소리였습니다.

 늘 우리 곁에서 한결같은 영감을 주는 자연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직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자기 아들의 심장소리를 녹음합니다. 마리오의 순수한 마음이 담긴 소리입니다. 우정을 나눈 친구에게 전하는 순박한 마리오의 시(詩)입니다.      

 

  

 다시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곧 무더위가 찾아오겠지요?

 제 마음속에는 태평양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아마 올해도 대구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이 여름은 보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어느 한 계절을 남미의 햇살 아래에서 네루다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보낼 날도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온몸으로 햇살을 오롯이 맞으며 네루다가 거닐던 바다를 거닐며 마리오가 귀 기울였던 파도소리, 바람소리를 듣는 ‘뜨거운’ 여름이 저에게도 오겠지요? 그때를 꿈꾸며 올여름은 ‘소라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감성’으로 깨어 있겠습니다.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의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푸른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 파블로 네루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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