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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May 16. 2020

이 남자와 결혼하면  현빈을 포기해야 해?

               -  인디언 추장의 며느리 찾기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빵을 훔치기 전에 ‘굶고 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빵을 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잠깐이라도 고민을 했겠지요?

영화 <자전거 도둑>의 안토니오는 어땠을까요?

인어공주는 사람의 다리를 얻는 대가로 목소리를 잃게 되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칼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도 고민 없이 사람의 다리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왕자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바다에 빠져 물거품이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은 또 어떠했을까요?

아마 고민에 고민을 더했을 것이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딜레마(dilemma)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경험 있으시죠?     

사소하게는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물건을 구입할 때도 그러하고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중요한 진로나 결혼 상대를 결정할 때도 선택의 순간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고민을 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에 나머지는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남자와의 결혼을 결정하게 되면 현빈도 공유도 모두 포기해야 하니까요. ^^     

모두를 가질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 다시 물릴 수 있는 경우라면 고민의 강도는 약해집니다. 하지만 번복할 수 없는,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경우는?      

     

(로마 산탄젤로성에서 다정한 둘...2019.1)


인디언 마을에서 추장의 며느리를 결정하는 방법, 들어보셨나요?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라 팩트 체크까지는 안 해 본 얘깁니다만.

혼기가 찬 신부 후보들은 옥수수밭에 모아 두고 큰 옥수수를 하나씩 따오게 한답니다. 물론 가장 큰 옥수수를 따온 아가씨가 훌륭한 신랑과 결혼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한번 선택한 옥수수는 버릴 수 없다는 것과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곧장 가되 한번 지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거의 대부분의 아가씨들이 빈손으로 밭을 나온답니다. 제법 굵은 옥수수를 발견하고도 혹시 저 앞에 더 큰 옥수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알 수도 없는 앞날에 대한 허망한 환상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고,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일러 주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단순하게 아가씨들의 갈등과 고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법 굵은 옥수수를 발견한 아가씨들은 꺾을까 말까 얼마나 고민을 할까요? 결국 빈손으로 나온 아가씨는, 멋진 남자와 결혼하게 된 아가씨의 옥수수가 자신이 좀 전에 포기했던 옥수수보다 작은 것을 보게 되었다면 속이 얼마나 상할까요? 라디오에서 들은 대중가요가 떠오르네요. ‘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 사람 영영 떠나요~’ 하는. 히히히     


선택의 순간은 시시때때로 찾아옵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겨 고민-결단-해결을 하고 나면 또 어느새 다른 문제가 찾아와 기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민도 없이, 후회도 반성도 없이 그냥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과연 편할까 싶기도 합니다.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 나오면 이것, 뒷면 나오면 저것’하고 운명에 맡기는 선택은 어떨까요? 내 삶의 문제는 스스로 고민하여 결정하는 것이 보람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하면 후회는 남을망정 원망은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택이 어려운 거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무뚝뚝한 침묵 씨를 결정하는 대신 멋진 남자 현빈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 누군가가 “이게 최선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 상황에서는 나의 결정이 최선’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피믹스밖에 탈 줄 모르는 침묵 씨를 결정하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주인 공유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나의 결정이 최선’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택한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기억해요, 우리.

나의 결정이 최선이었다는 거.      


(나의 최선의 선택, 침묵씨 - "침묵씨, 당신에겐 초상권이 없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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