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에 한번 꽂히면 오랫동안 빠져드는 성향이 나에겐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노래 ‘Belle’에 꽂혀 그 비싼 뮤지컬을 네 번이나 무리해서 보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라오스 사람들의 미소와 “싸바이디~”하고 건네는 그 인사말의 어감이 좋아 5개월 간격으로 세 번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읽은 책도 읽고 또 읽고, 본 연극도 보고 또 보고. 심지어는 스무 살에 만난 첫남자에게 꽂혀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 ㅎㅎ
연극 <염쟁이 유씨>를 또 보았다. 1인극이라 관객들을 불러 올려 극의 흐름을 돕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기에 용감하게도 스스로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염쟁이 유씨가 건네는 소주 한 잔을 얻어 마시고서야 내려왔다.
평생을 시신 염하는 일을 하며 살아온 염쟁이 유씨는 말했다.
“죽는 거 무서워들 말어.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티베트 속담에 ‘비둘기는 밤새도록 잠자리를 만들다가 만들다가 결국 잠들기 전에 아침을 맞는다’는 말이 있다.
하루하루 우리는 소중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티베트 비둘기처럼 오늘 하루하루를 내일을 위한 준비로 채우며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기지도 않은 내일 걱정을 미리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준비하고 있는 내일보다 다음 생(生)이 먼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질 텐데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을 내일로, 다음으로 자꾸 미루고 아끼면 끝내 전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라싸에서의 둘째날, 간덴사원 트레킹 중 조장터를 보게 되었다. 조장(鳥葬)이라는 말보다 나는 천장(天葬)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천장은 티베트의 대표적인 장례 방식으로 시신을 독수리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 야만스럽고 미개하다고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고산 지대라 산소도 희박하고 건조하여 시신을 매장(埋葬)하여도 잘 썩지 않고, 땔감도 부족하여 화장(火葬)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결국 천장은 티베트의 척박한 환경에서 선택할 수 있는 그들만의 최선의 장례 문화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티베탄들만의 정신 세계가 반영된 것이라 여겨진다.
‘태어난 인간은 늙지 않을 수 없고, 늙은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없고, 죽은 인간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품고 살아가는 티베탄들에게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의 윤회사상을 믿는다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으니 영혼이 떠난 육신을 빈 껍데기라고 여겨 온전히 던지고 훌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티베트의 어떤 스승은 티베탄들의 소원이 윤회사상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체투지 같은 힘든 수행을 감수한다고도 하던데, '죽은 인간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다행이란 걸까, 다시 태어나지 않고 싶다는 걸까. 짧은 나의 지식과 생각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는다.
티베탄들은 생일을 기억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단다. 그 이유는 태어난 날을 기억하는 것보다 죽을 날을 알 수 있도록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 나같은 사람이 티베탄들의 높은 정신세계를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수리에게 온몸을 온전히 주고 독수리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 산화(散華)할 때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 믿는 것은 자연 환경의 영향을 떠나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순수한 영혼들이 알 수 없는 죄를 지어 갇힌 감옥이 육신이라더니 그 업보를 다하고 이젠 영원불멸의 피안(彼岸)으로 떠나는 의식 같기도 하였다.
간덴사원 뒤 천장터 언덕배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천장터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서부터 따라온 것인지 황구 한 마리가 바닥에 입을 대고 먹을 것을 찾는다. 죽음의 공간에서 만난 배고픈 황구 한 마리….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고은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죽음과 삶은 참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이랄까.
칼이며 도끼 등 천장사가 사용했을 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용감한 나의 룸메이트 정원쌤이 천장터의 가운데 자리에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웠다. 영혼을 떠나보낸 많은 육신들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던 그곳에. 거기 누워 바라보는 티베트의 하늘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멀찍이 앉아있던 나는, 지금 내가 앉은 이곳은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의 육신을 독수리들이 쪼아먹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을 유족들이 앉아 있던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발 아래 하얀 뼛조각들이 서걱거리며 밟혔다.
옆에 있는 봉수대같이 생긴 곳에 시신의 일부를 태워 연기를 올리면 그 냄새를 맡고 어디에선가 새까맣게 독수리들이 몰려들어 천장사가 시신을 조각조각 나누어주기를 기다린단다. 천천히 천장터를 돌아보니 머릿속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천장의 장면들이 자꾸만 그려졌다. 하지만 끔찍하고 혐오스럽다기보다는 뭔가 마음이 경건하고 진지해졌다. 동행한 길벗들도 제각기 모두 이 죽음의 장소에서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