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의 다산(茶山)이 먼 땅끝 유배지에서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모함으로 유배된 지 10년 즈음 아들의 노력으로 어렵게 사면이 내려졌지만 그의 복귀를 두려워한 조정의 신하들의 방해로 일이 순리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사면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던 인척과 다산의 옛 친구에게 호소해 보자는 아들의 편지에 이런 답장을 보낸 것이다.
다산은 아들이 제안한 방법은 ‘세 번째 등급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나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일’이라고 덧붙이며 그런 처신을 왜 굳이 하겠느냐고 조용히 타이른다.
다산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정민 교수는 그의 저서 <다산어록 청상(茶山語錄 淸賞)>에서, 옳은 것을 지켜 이로움을 얻기란 어려운 일이며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은 싫어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른 일을 해서라도 이로움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 해로움만 불러들이게 된다고 했다. ‘첫째는 드물고 둘째는 싫어 셋째를 하다가 넷째가 되고 마는 것’이란 설명이다.
<다산어록 청상(茶山語錄 淸賞)>의 청상(淸賞)은 “맑게 감상한다”는 의미이다. 긴 역병의 시대가 끝나가는 이 시기에 한번 새겨볼 말이다. 재난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볼 새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어 가는 것 같은데 뭔가에 쫓기듯 일상은 분주하기만 하다. 하루하루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만도 힘겨워 마음은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비(是非)의 저울보다
이해(利害)의 저울이 늘 앞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이로움의 저울 바늘만을 좇고 있는 것 같다.
이 계절, 시대를 뛰어넘어 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살기를 권하는
다산의 낮은 목소리를 청상(淸賞) 해 보자.
어쩌면 삶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우리에게
그래도 부여잡고 버틸 수 있는
심주(心柱) 하나 세워 줄지도 모르니.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내 밭을 등에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머리에 이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 결국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이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