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향 May 15. 2022

지옥을 통해 천국을 꿈꾸다

-단테 <신곡(神曲)> 「지옥」편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게 된 것은 그리 두껍지 않은 소설 판본이었다. (서상원 옮김. 스타북스) 각 곡(曲)마다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이 실려 있고, 대서사시라기보다는 소설 형식으로 쉽게 옮긴 것이어서 줄거리를 파악하며 읽기는 아주 수월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소설 형식으로 옮기다 보니 서사‘詩’가 가지는 운율감은 전혀 없고, 비유적 혹은 우의(寓意)적인 표현을 감상하는 재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김운찬 교수 번역본 <지옥편>과 로댕의 <지옥의 문>

 이번에 다시 「지옥」, 「연옥」, 「천국」으로 나눠 번역된 김운찬 교수님의 <신곡>을 읽었다. 제대로 된 <신곡> 감상이었으며 조금 확대해 고백하자면 고전(古典)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특히 지옥 여행에서 만난 인물들과 사건들은 읽는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제3곡>의 처음 부분과 하부 지옥인 <제12곡~제17곡>까지 이어지는 일곱째 원에서 만난 ‘폭력의 죄인들’에 대한 부분이 오래 여운을 남겼다.     

- 지옥에 들어가다 <귀스타브 도레 작품, 이하 모두>


 <3>

  나를 거쳐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가노라.

  정의는 높으신 내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 <제3곡> 1~9행     


 단테가 입구 지옥을 들어가기 위해 들어선 지옥의 문 위에 쓰인 글귀이다. ‘여기 들어오는 /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 구절을 여러 차례 되뇌어 보았다. “스승님, 저 말뜻이 저에게는 무섭군요.”하던 단테의 말처럼 참 무섭고 절망적인 말이다.

 꼭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니라도 희망이 없는 곳은 어디라도 지옥이라는 의미로 와닿기도 하고, 지옥은 작은 희망조차도 품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곳임을 알려 주는 구절 같기도 하다.

 ‘탄식과 울음과 고통의 비명이 / 별빛 없는 대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 곳(<제3곡> 22~23행), 죽음의 희망도 없 곳(46행) - 지옥이 지옥인 이유다.     

 

 


<13>  - 생명의 주권자는 하느님     

 폭력의 죄인들이 벌 받고 있는 일곱째 원은 <제12곡>~<제17곡>까지 이어진다. 그곳 이야기는 다시 세 개의 ‘둘레(girone)’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 둘레에는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한 죄인들, 둘째 둘레에는 자살자나 방탕한 자와 같은 ‘자기의 육체와 소유물’에 폭력을 가한 자들, 셋째 둘레에는 남색자(男色者)나 고리대금업자와 같이 ‘자연의 순리, 법칙’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벌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절제를 모르고 재물을 낭비한 자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자들


자신의 육체에 폭력을 가한 자들(자살자)


 <제13곡>에서 단테가 스승과 함께 들어간 숲은 ‘푸른 숲이 아니라 어두운 빛깔이었고’(4행) ‘열매는 없고 독 있는 가시들뿐이었’다.(6행) 단테가 큰 가시나무의 잔가지 하나를 꺾자 ‘왜 나를 꺾는 거야?’라고 외치는 그곳은 ‘사람이었고 지금은 나무가 된’ 자살자의 숲이었다. (33행)(37행)

 자살자(自殺者)는 자신의 육체에 폭력을 가한 죄인들이다.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부정(否定)하고 생명을 버린 그 영혼들은 이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피동적인 나무가 되어 하르피아들에게 뜯어 먹히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최후의 심판 날이 와도 생전(生前)의 육신을 되찾는 다른 영혼들처럼 자신의 육신을 되찾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버린 것을 / 다시 갖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며(104~105행), 자신의 ‘집을 교수대로 만들’어(151행) 육신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피조물을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웃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하고, 자연환경도 아끼고 사랑해야 하며, 자신의 육체 역시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생명의 주권자는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음은 반드시 기억할 일이다.       

     



 지난주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마지막 장 주제가 ‘죽음’이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또 해보게 되었다.

 몇 해 전에 사전 연명치료 의향서에 서명을 하면서 사후(死後)에 각막과 인체 조직 기증, 뇌사시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다. 죽음의 순간에 나의 주검이 남아 있는 누군가의 삶에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도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면 삶이 더 소중해지고 진지해진다.  ‘별빛’도 ‘희망’도 없는 지옥 여행을 다 마치고서야 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보게 된 그들처럼.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지옥을 통해 천국을 꿈꾸게 된다.


 마침내 나는 동그란 틈 사이로 하늘이    

 운반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별들을 보았다.

  - <제34곡> 137~139행



** 별 (이탈리아어로 stelle) - <신곡> 세 편 - 지옥, 연옥, 천국-은 모두 이 단어로 끝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求其放心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