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우, <사랑이 한 일>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98쪽)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 바치기가 어려운 것이 그 때문이다. (99쪽)
아무에게나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 (104쪽)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아버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아버지 자신을 사랑하지만 바치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105쪽)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지 않은 그 말을 나는 들었고, 그 뜻을 이해했다. … 내 안에 말을 넣어준 이는 누구였을까? 일어나기 힘든 어떤 대단한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107쪽)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 (112쪽)
간혹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실은 항상 바치는 분이다. 바칠 것을 요구할 때 그분이 받으려 하는 것, 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바친/마련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받은 것,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바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을 바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을 바치거나 바치지 않거나 할 뿐이다. (113~114쪽)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은 없다. 시험이라는 비순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사랑보다 더 순수하고 큰 사랑은 없다. 비순수를 통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순수가 있다. 사랑이야말로 그러하다. …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순수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114쪽)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신의 음성을 들은 다음에야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 건지 마침내 자각하고 탈진해서 쓰러졌다. … 자기가 하려고 했던, 신이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하고 말았을 그 일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그는 침묵을 택하고 그 시간을 봉인했다.(120쪽)
그날 밤, 별들이 캄캄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밤에 그 산에서 나는 신으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다. … 그 가운데서도 아주 조금밖에 옮길 수 없는 것이 내 한계다. … 마음속이 가득 차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을 하면 말한 만큼 달아나버려 아무리 많이 말해도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신비.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더 많이 말하게 되는 비밀. 그 밤 이후 나는 사색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에 들어온 말들이 성좌를 이루었다. 별들은 제 밝기로 빛나며 우주를 신비로 만든다. 그 산에서의 하루는 내 인생의 모퉁잇돌이 되었다. 내 인생의 집은 그 하루 위에 지어졌다. 내 인생의 집은 그 하루 위에 지어졌다. 하늘을 보고 들판을 거닐며 나는 내 안의 성좌들, 그 밤에 들었던 엄청난 말들을 되새긴다. 내 안에 더 깊은 길이 펼쳐져 있다. 내 사색 속으로 신의 음성이 끼어들면 나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음성을 풀기 위해 걷다가 멈추고 멈춰 있다가 걷는다. 나는 아직 그 밤에 들은 말들을 다 풀지 못했다. (122~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