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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May 19. 2022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사랑이 한 일>은 구약성경 창세기를 모티프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이 담긴, 이승우 작가의 소설이다. ‘소돔의 하룻밤’으로 시작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는 사라를 대신하여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의 이야기를 다룬 ‘하갈의 노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게 되는, 아니 바칠 뻔한 사건을 다룬 ‘사랑이 한 일’, 그리고 늙은 이삭과 두 아들 -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다룬 ‘허기와 탐식’, 마지막 ‘야곱의 사다리’까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아브라함 삼대의 이야기다.      




 그중 세 번째 수록 작품이자 작품집의 정점을 찍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 한 일’이다.  처음 읽을 때는 스토리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도돌이표 같은 전개에 ‘이게 뭐야? 뭐야, 이거?’ 당황스러웠다. (물론 첫 수록 작품인 ‘소돔의 하룻밤’도 비슷한 형식이라 조금 적응은 됐다고는 해도) 읽어 갈수록 그 난해한 새로운 형식의 전개가 쉽게 풀리지 않는, 뻔하지 않은 고난도 문제를 마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묘한 이끌림이 있었고, 마지막 장을 읽을 땐 긴 호흡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이삭의 목소리 -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98쪽)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니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저를 바치라는 요구를 그분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지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셨다니요. 아끼는 무엇을, 사랑하는 누구를 바치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라고요?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 바치기가 어려운 것이 그 때문이다. (99쪽)     


 그래서 사랑은 참으로 무서운 것인가 봐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그분의 요구는 모두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군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저이기에, 그분께서 저를 바치라고 요구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 하나 확실한 사실, 그분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어요.

아무에게나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 (104쪽)


 그분은 아버지에게, 그분이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왜 저를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하필이면 저를 지명하셨을까요? 그분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아버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아버지 자신을 사랑하지만 바치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105쪽)


아브라함과 이삭 (페르디낭 올리비에)


 아--, 사랑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에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건 아버지 자신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에게 속한 것 중 가장 사랑하는 것, 그것은 바로 저였어요. 그분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아버지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지 않은 그 말을 나는 들었고, 그 뜻을 이해했다. … 내 안에 말을 넣어준 이는 누구였을까? 일어나기 힘든 어떤 대단한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107쪽)


 사랑은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게 하고, 불가능한 요구 앞에 우리를 서게 하네요. 사랑 때문에 불가능하던 것이, 사랑 때문에 가능해지는 신비를 경험하게 되었어요. 모든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불가능한 일이고, 또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 (112쪽)


이삭의 희생(카라바조)


 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분께서 저를 당신께 주셨다는 것을요. 그분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었다면 저는 세상에 있지도 않을 존재였지요. 그러니 그분께서 돌려달라 하셔도 불평하고 불만을 가질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애초에 그분의 것이니까요. 그분이 당신께 마련해 주신 것이니까요. 네, 저도 알고 있어요.      

간혹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실은 항상 바치는 분이다. 바칠 것을 요구할 때 그분이 받으려 하는 것, 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바친/마련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받은 것,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바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을 바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분이 바친/마련한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을 바치거나 바치지 않거나 할 뿐이다. (113~114쪽)


 그래도, 그래도…. 왜 그분은, 왜 그분은…. 저를 번제로 드리는 것을 결국은 말리실 거면서 아버지에게 이런 힘든 요구를….  그분께는 왜 이런 시험이 필요하셨던 걸까요?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은 없다. 시험이라는 비순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사랑보다 더 순수하고 큰 사랑은 없다. 비순수를 통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순수가 있다. 사랑이야말로 그러하다. …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순수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114쪽)


이삭의 제사(렘브란트)


 아버지, 당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그분께 순종하셨듯이 저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 그분의 다급한 음성이 없었더라면….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신의 음성을 들은 다음에야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 건지 마침내 자각하고 탈진해서 쓰러졌다. … 자기가 하려고 했던, 신이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하고 말았을 그 일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그는 침묵을 택하고 그 시간을 봉인했다.(120쪽)     


 아버지, 저는 당신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어요. 짧고 얕은 인간의 말로 그날의 일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모두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사랑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요. ‘그 산에서의 하루는 내 인생의 모퉁잇돌이 되었’고, ‘내 인생의 집은 그 하루 위에 지어졌다’는 것을요. 

    그날 밤, 별들이 캄캄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밤에 그 산에서 나는 신으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다. … 그 가운데서도 아주 조금밖에 옮길 수 없는 것이 내 한계다. … 마음속이 가득 차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을 하면 말한 만큼 달아나버려 아무리 많이 말해도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신비.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더 많이 말하게 되는 비밀. 그 밤 이후 나는 사색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에 들어온 말들이 성좌를 이루었다. 별들은 제 밝기로 빛나며 우주를 신비로 만든다. 그 산에서의 하루는 내 인생의 모퉁잇돌이 되었다. 내 인생의 집은 그 하루 위에 지어졌다. 내 인생의 집은 그 하루 위에 지어졌다. 하늘을 보고 들판을 거닐며 나는 내 안의 성좌들, 그 밤에 들었던 엄청난 말들을 되새긴다. 내 안에 더 깊은 길이 펼쳐져 있다. 내 사색 속으로 신의 음성이 끼어들면 나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음성을 풀기 위해 걷다가 멈추고 멈춰 있다가 걷는다. 나는 아직 그 밤에 들은 말들을 다 풀지 못했다. (122~123쪽)



아브라함의 이삭 뱐제(A.P. 로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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