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은퇴를 즐기려면 지루함을 견디고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버트란드 러셀의 말이라지만, 몇 년째 그 출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 속 글이 아닐까 했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게으름'은 우리 선입관과는 많이 다르다. 그의 게으름은 '여가와 휴식'이다. 궤변 같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이런 맥락이다.
"모두가 게으르다면 원시 농경시대의 공정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모두가 열심히 일한다면 능력자들은 부유해지겠지만, 능력이 처지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만다. 가진 사람들이 조금 더 게을러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약간의 기회라도 주어진다."
러셀이 살던 시대의 영국 사람들은 유한계급들만이 게으를 자격이 있고, 휴일과 여가를 즐길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로지 부자들의 여가를 위해 일만 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여가를, 여행을 그리고 고상한 휴식을 취하는 것에 부당한 일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유한계급들은 '근로는 미덕'이라는 관념을 심어 주고자 몹시 노력했다.
생산성이 100% 향상 - 하루 4시간 노동으로 8시간의 성과를 거둔다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문제는 그 과실이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잉여 생산이나 경제적 렌트로 자본가에게 귀속되고, 일자리는 줄어드니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그럴 바에야 하루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게을러지자 - 여가를 즐기자 - 는 것이 러셀이 게으름을 찬양하는 이유다.
러셀은 "풍족한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하는 행위를 다른 사람의 빵을 빼앗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행태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이미 충분히 가진 사람들은 조금 더 가져보겠다고 꼬마 빌딩을 사고, 임대료를 올리고, 5%짜리 저축은행 예금 한도를 싹쓸이해 버린다. 사우나하다 만난 일흔 살 노인은 전세 사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월세 놓고 편히 잘 사는 법을 강론해 줬다.
얼마 전 숲해설가로 활동하는 일흔다섯 살 어르신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교통비와 식대 빼면 남는 건 없지만 한 달에 이백만 원 남짓 번다고 스스로를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재산과 경력에 있어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먹고 사실만 한 처지인 듯한데 젊은 세대 일자리 뺏는 작은 탐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점잖은 댓글을 읽고선 가슴이 철렁했다.
고백하자면 지난해 기십만원 짜리 작은 일자리에 응모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남의 일자리를 빼앗는 몹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철회해 버렸다. 러셀의 말대로 퇴직 후 잠깐의 지루함에 현혹되었던 것 같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할 일은 자원봉사이거나 젊은 세대들이 외면하는 분야라면 맞다. 자원봉사조차 남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라면 관심의 스위치를 꺼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양극화의 끝판왕은 연예계다. 단발 CF 출연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몇몇 연예인은 열 편 가까이 채우면서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방송 저 방송 대 여섯 개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하는 몇몇 MC들도 이름도 모르는 종편까지 독식하고 있다. 돈이 궁해서는 아닐 것 같고 "놀면 뭐하니"해서 일까? 섭외가 왔을 때 저는 아름답게 조금은 곤궁한 이에게 양보할 수는 없는 걸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 추와 같다."라고 했다. 부자들은 더 가질 게 없어 권태롭기만 하고, 권태를 해소하려고 남의 것을 탐낸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권태 놀음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경제적 렌트를 갖다 바치다 더 가난해진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비밀이고, 신자유주의의 치명적 함정이며, 극단의 양극화로 가는 악순환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