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삭히는 게 아니다. 큰 탈이 난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 했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마망(어머니)의 죽음 후 2년간 그녀를 그리며 『애도일기』를 썼다. 어쩌면 과할 정도로 마망의 죽음에 집착적이다. 하긴 스탕달도 어머니 사후 7년 동안 하녀에게 어머니의 옷을 입고 일하게 했다지 않는가.
아버지 없이 평생 아들에게 몰입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 바르트의 감정, 집착ㅇㄱㄴ가? 그건 짐작만으로 판단할 수준은 아니다. 바르트는 애도와 우울(멜랑콜리)을 구분했다. 애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바르트는 18개월 정도가 적당하다고 적고 있다. 그 기간이 끝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와야만 한다. 우울은 병이다. 우울은 부정적이고 헤어나기 어렵다.
애도와 우울의 차이를 처음 고민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상실한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로는 이음동의의 말이다. 하지만 애도는 점차 상처를 받아들이고 자기 책임성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사랑으로 채워 나간다. (가수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를 생각하라.) 반면, 멜랑콜리는 병리적이며 껴안기를 거부하고 상처를 떠나지 못하고 집착한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와 롤랑 바르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를 생각해 본다.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극심한 우울증 환자다. 결혼식 내내 두통을 호소하고, 다른 남자와 섹스하고, 갑자기 사표를 내던진다. 지구가 망했으면 한다. 멜랑콜리아의 또 다른 정체는 조만간 지구와 부딪쳐,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태양 반대편을 도는 행성의 이름이다.
저스틴의 멜랑콜리아는 행성 멜랑콜리아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래서 지구의 멸망도 저스틴에게는 그냥 그런 일어날 일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공포에 빠진 언니와 조카를 나뭇가지로 만든 마법 동굴 속에서 산산조각 나는 지구를 느긋이 받아들인다.
생각이 흐르는 동안 우울증에 묘약이 없다. 보르헤스식 무한으로 말하자면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가 방해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흐름을 단절시키는,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식 무의식적 풀베기 노동이 답이라면 그렇다.
메갈로폴리스 서울의 어느 좁고 가파른 거리에서, 낯선 축제를 벌이다 일어난 사고가 참사가 된 후 애도는 막싸움으로 변질된 기상천외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애도했지만, 애도의 기간을 마무리했다.
『애도일기』에 나오는 한마디 더,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