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순혈주의 그리고 평생직장
숲해설가 전문과정에는 현장실습 서른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유튜버 ‘레옹이 TV’ 운영자와 함께 ‘따릉이를 타고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탐방’ 프로그램에 보조강사로 참여했다. 63 빌딩 부근에 멈추고는, 25미터나 되려나 키 큰 나무의 이름을 물었다. 미루나무 같기도 하고 버드나무 같기도 한데, 정답은 이태리포플러이다. 이 나무는 무슨 연유로 이탈리아를 떠나 먼 한국에 건너와 살고 있을까?
사연은 이렇다. 캐나다 포플러가 유럽으로 건너가 미루나무와 교잡하여 강력한 잡종이 탄생했다. 속성 방풍림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은 전후 산림녹화를 위해 생장이 빠른 속성 조림수를 찾고 있었다. 1955년에 이탈리아 교잡종을 들여와 번식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태리포플러라고 부른다. 높이는 30m에 이르고 지름은 80cm인 낙엽성 교목으로 1년에 지름 1센티씩 자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 있네"라는 가사에서 빠른 생장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미루나무는 버드나무과에 속하며,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는 의미로 ‘미류(美柳)’라고 부르다 표준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루나무로 바뀌었다.
이태리포플러도 버드나무과에 속한다. 버드나무는 유독 잡종이 많은데, 잡종의 강점은 강한 번식력에 있다. 왜 그럴까? 버드나무는 암수딴그루, 자웅이주(雌雄異株) 식물이다. 암수한그루인 자웅동주(雌雄同株) 식물보다 자가 생식 확률이 낮아,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갖게 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참나무 종류가 우점종(優占種)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잡종을 잘 만들기 때문이다. 대왕참나무, 정릉참나무 같은 것들이다.
버드나무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수양버들, 키버들, 왕버들, 양버들, 선버들, 갯버들, 호랑버들 등 약 40종이 넘는다. 그래서인지 버드나무에 대한 일화가 적지 않다. 양치질의 양치가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닦았다는 양지(楊枝)에서 유래되었다는 속설이 있고, 여성을 버드나무에 빗대 가는 버드나무 허리(細柳腰), 버들잎 같은 눈썹, 노류장화 등으로 비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 조리로. 파랑새 노래하는 버드나무 아래로”,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등 대중가요 가사로도 빈번히 쓰이는 것을 보면 우리 주변에 매우 흔하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버드나무는 사랑받고 많이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도 버드나무 공원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버드나무 아래서 내 사랑과 나는 만났지요 / 그가 버드나무 공원을 걸었어요 / 눈처럼 하얀 작은 발로 말이에요”
얼마 전 대학원 후배를 만났다. 1인 기업 창업에 대해 컨설팅을 받기 위해서였다. ‘숲과 회사생활’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제한된 경험과 매너리즘, 무경험의 오류로 인한 상상력의 빈곤을 걱정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살짝 당황하였다.
"선배님과 같은 일관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 직장에서 33년을 신입사원부터 임원까지 지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지위를 다 겪어 보셨잖습니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만해도 이번 직장이 세 번째인데 연봉을 조금 올랐지만 매번 새로 적응하고 사람을 사귀어야 하니 경력이 단절되는 느낌이 많아요.”
조직의 순혈주의는 우리나라나 일본 등 공채제도를 유지하는 조직에서 흔하다. 순혈을 숭배하는 조직에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강하다. 순혈주의 자체가 가진 장점이 많다. 같은 문화와 환경,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어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고속성장 궤도에 들었을 때 또는 위기의 순간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인다. 반면 동기 문화, 온정주의, 관대화 경향으로 조직의 변화가 느리다. 어느 순간부터 의사결정 과정이 길어지는데 위기의 시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조직문화에서도 현상유지 성향(status quo bias) 혹은 위험회피 성향이 팽배해짐으로써 성과 중심의 보수체계, 발탁 인사, 연봉제 도입, 처벌의 강화 등 조직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스템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유명한 대사를 보자. 인턴사원 앤디가 불평을 널어놓자 동료 나이젤이 말한다.
"그럼 그만둬, 그만두라고. 5분 안에 널 대신할 사람 구할 수 있다고. 그것도 간절히 원하는. 넌 노력하지 않아. 넌 징징대는 거야. 정신 차려."
미국 직장의 흔한 이야기지만 우리 처지에서 보면 비정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 전 공기업과 민간기업 CEO 사이에 외부 인재 수혈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인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떡잎부터 차근차근 키운다.”와 “바뀐 세상에는 과거의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로 나뉘었다. 순혈주의와 혼혈주의의 생각은 이처럼 다르다. 이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평생직장에 대한 강한 기대와 함께, 새로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이원적 상황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순혈주의에 처음 금이 간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평생직장을 의심할 징후는 전혀 없었다. 매기 역할 혹은 전문가 영입을 빌미로 외부인사를 채용하면 “승진 자리 갉아먹는다, 혼자 잘난 척한다. 몰라서 못 하냐,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시스템이다” 등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작동했다. 오래전이지만 합병은행이 피합병 은행의 직원들을 무연고 지점으로 발령내고 왕따를 시켜 대부분이 사표 썼다는 슬픈 이야기도 들렸다. 세상은 바뀐 듯하다. 지금 공정과 배려라는 담론 하에 순혈주의가 우세하지만 채 10년을 버틸 것 같지 않다.
짐 콜린스는 <그 많던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몰락하는 기업은 대부분 성공신화에 도취하여 위험 인내력(risk tolerance)이 약화된 탓을 첫 번째로 들고 있다. 앞으로 최소 세 번에서 다섯 번은 직장을 옮겨야 하는 시대이다.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지금의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50%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짐 로저스도 놀랐다는 백만 명의 공시족 신드롬은 여전히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꿈꾼다. 평생직장이 바람직하겠지만,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꿈꾸기에는 세상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또 그럴 수도 없다. 직장인들의 피로와 번아웃은 점점 심해져 간다. 개인도 조직도 수혈이 필요할 때 헌혈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