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마침내 사랑할 결심 그리고 헤어질 결심

<러브 레터>의 파이란, <헤어질 결심>의 서래

by 포레스트 하이

"편지는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


자크 라캉이 애드가 알랜 포우의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철학적 주제지만, 문언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언젠가 보낸 신호는 언젠가는 어떤 방식이건 꼭 수신자에게 전달되고 만다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는 눈빛이건 몸짓이건 차마 보내지 못했던 편지 건 상대에게 '마침내' 도착한다. 누군가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쏘아진 신호라면 말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첫눈에 반한 사랑」과 같이 같은 지하철 칸에서 후덥지근한 공기를 같이 마셨고, 어느 관광지의 호텔 로비 회전문을 앞뒤로 통과했으며, 공항에서 길거리에서도 스치며 지나쳤을 수도 있다. '서로 읽진 못했지만' 수많은 인연의 신호들이 오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시간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었다.
-「첫눈에 반한 사랑」 중,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vhtmxj.jpg 영화 포스터, 「파이란」 (왼쪽), 「헤어질 결심」 (오른쪽)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2001)」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 두 영화 사이에는 약 20년 시간의 간극이 마주 보고 있다. 아! 지난 2021년 「파이란」이 2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되었으니, 두 영화는 같은 시대에 같은 영화관에서 거의 동시에 만난 인연도 있다. 아마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파이란(白蘭, 장백지 扮)과 서래(탕웨이 扮) 두 여자 주인공은 어떤가? 중국에서 건너왔고,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죽음 이후였다. 파이란은 친척을 찾아 인천으로, 서래는 할아버지의 산을 되찾기 위해 평택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한국에 뿌리내려 보려고 비극이 예견된 위장결혼을 하면서 서사(序辭)는 시작된다.


사랑의 신호가 담긴 편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파이란의 매체는 '손 편지'다. 『철도원』을 쓴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러브 레터』가 영화의 원작이다. 두 통의 편지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의 감성으로 이끈다. 사실 일본 영화는 편지가 줄거리의 매개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나미야 백화점의 기적」, 「러브 레터」, 「 도쿄 타워」,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가 그렇다.


편지.jpg 강재에게 편지를 쓰는 파이란(왼쪽), 음성 번역기를 통해 대화하는 해준과 서래(오른쪽)




사랑은 원래 불완전한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오래전에는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성, 즉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웅동성(雌雄同性)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사람은 암수한몸이었는데 분리되었다고도 하고. 「파이란」과 「헤어질 결심」두 영화 모두 비극적 사랑에 관한 서사다. 파이란과 서래, 두 여자가 사랑이라 인식했을 시점은 언제였을까?


강재는 얼굴도 모르는 파이란의 죽음의 행적을 추체험(追體驗) 하던 중 파이란이 보낸 편지를 읽다 오열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망이 심연처럼 가라앉는 순간 한 장의 사진이 파이란의 눈에 들어온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웃고 있는 강재의 사진을. 그 순간 파이란은 "사랑할 결심"을 한다. 파이란에게는 '친절한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다. 마침내 파이란은 강재에게 편지를 쓴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 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 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 파이란의 편지 중, 영화 「파이란」


서래에게 사랑은 다가왔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초밥을 배달시켜 줬을 때? 아이스크림 먹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자존감을 붕괴시키면서 스마트폰을 바닷속 깊숙이 버려라고 말했을 때? 영화 감상은 관객의 몫이므로 각자 느낌은 다를 것이다. '붕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는 어떤가. 해준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지만, 그 신호가 서래의 마음에 '마침내' 도착한 시점은 그때가 아닐까?


파이란.mp4_004119701.png 파이란이 강재가 준 빨간 목도리를 들고 강재의 사진을 보고 있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해준의 대사, 『헤어질 결심』


남편의 죽음에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서래를 비난하자, 해준은 슬픔이 다가오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큰 슬픔에 곧바로 오열하는 사람과 꾹꾹 눌러 참는 사람의 차이다. 사랑이 다기 오는 모습 또한 그렇다. 누구에게는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또 누구에게는 파도처럼 불현듯! 서래의 사랑은 슬픔과 마찬가지로 파도처럼 격렬하게,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떠난다.


파이란과 강재 사이에는 어떤 추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강재가 별생각 없이 던져 준 빨간 목도리가 파이란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추억거리다.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파이란은 강재의 아내로 죽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편지를 남긴다.


해준과 서래는 402일간의 긴 침묵의 시간을 견뎌낸다. 재회의 순간 서래는 해준의 바뀐 구두를, 해준은 서래의 드레스를 소환해 낸다. 서래는 물고기 모양의 초밥 간장 용기를 간직한다. 사랑이 부재할 때 그 사람의 온기를 대신할 무엇이 필요했다. 그리고 서래는 마침내 '헤어질 결심(자살)'을 하며 해준에게 기억 속의 미결 사건으로 남으려 한다.


파이란 바다.jpg 「파이란」에서의 장백지(왼쪽), 「헤어질 결심」에서의 탕웨이(오른쪽)




영화 「파이란」의 엔딩. 아직 썰렁한 봄 바다를 배경으로 배시시 웃는 스무 살의 장백지를 – 섹스 비디오 유출 사건이 있었지만 – 대신할 파이란은 없다. 탕웨이는 「색, 계」, 「지구 최후의 밤」, 「만추」에서와 같이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있다. 만약 서래가 장쯔이였다면, 공리였다면, 판빙빙이라면, 아무리 대입해 봐도 탕웨이를 대신할 수 없다.


장백지와는 한국차를 한잔 마시고 싶고, 탕웨이와는 스페셜티 드립 커피를 마시고 싶다. 장백지와는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탕웨이와는 퇴근길 혼잡한 지하철을 같이 타고 싶다. 영화 대사로도 그건 증명된다.

(강재 씨) 이 편지를 보신다면 나는 죽습니다. (…) 당신을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파이란의 편지)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서래의 독백)


파이란이 보낸 편지는 결국 강재에게 도착했고, 서래가 바다에 던져 버렸던 스마트폰도 해준의 손에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상처 없는 사랑을 기억되지 않듯이, 그래서 편지는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다. 파이란의 편지 " 좋아하게 되면 힘들어지니까요."를 읽으며 사랑의 게임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된다.


두 여자의 사랑에 대해 부질없는 집착일 수도 있고, 불멸의 사랑일 수도도 있다.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마침내 헤어져야 하는 지점에 도착했을 수도 있고, 숭고한 사랑일 수도 있다. 강재와 해준 두 남자는 마지막에는 바다로 나간다. 봄의 동해 바다와 안개의 도시 이포였다. 로망 가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장 강렬한 아홉 번째 사랑의 파도가 밀려왔을 때 두 남자의 사랑 또한 끝나 버린다.


노래.jpg 막문위의 '애정'(왼쪽), 정훈희 송창식의 '안개'(오른쪽)

「파이란」 엔딩 곡은 홍콩 가수 막문위의 ‘애정(愛情)'이다. 수줍은 듯 봄 바다를 배경으로 파이란은 나지막이 서툰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왜 잠을 이루지 못할까요? 그리워요. (…)" 「헤어질 결심」의 엔딩 크레디트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부르는 새로운 「 안개」로 4분 넘게 흘러내린다. 서래가 묻혔을 모래톱을 밟고 "안갯속에 외로이 가야만 하"는가.


그리고 탕 웨이가 한국말로 불렀던 노래 「 꿈속의 사랑」! "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소리 없이 이 밤도 울어야 하나~~~"의 가사가 구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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