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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Feb 17. 2019

낮과 밤의 경계, 어스름 빛깔의 멋

짧은 시간의 빛 잔치

어스름.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어둠과 빛이 교차되는 시간이다. 어두움과 밝음이 엇갈리는 이 시간에 코발트 빛의 어스름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해가 주인공이 된 일몰이나 일출도 아름답지만, 어스름은 그 아늑한 빛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다.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기 전에 그 경계의 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되지만 어스름의 순간은 잠깐이다. 곧 빛이나 어둠에 자리를 내준다. 낮이나 밤으로 가는 시간의 디딤돌인 것이다.   

   

어스름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불린다. 물체가 실루엣으로 보이는 시간대여서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개인지 늑대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여서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스름은 하늘이 준 아름다운 빛깔을 담기에는 안성맞춤의 시간이다. 일출을 찍으러 나갈 때는 조금 더 일찍 움직이고, 일몰 출사를 갔을 때 해진 뒤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면 된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나타나기 때문에 렌즈를 통해 빛을 계속 점검하거나 찍어두는 게 좋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어스름 사진은 아래 사진이다. 계획을 세우고 나간 게 아니다. 우연히 지나다가 너무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셔터를 눌러댔다. 어스름의 빛깔 속에 도봉산과 초승달, 별이 한 줄로 선 멋진 장면이었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사진으로 담는 어스름의 멋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첫 사진치곤 빼어난 장면을 감사한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도봉산의 어스름

남양주에 있는 물의 공원의 어스름 장면은 사연이 좀 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맹추위가 몰아치는 한 겨울에 두 번 수고를 해야 했던 경우이다. 사진을 찍다 보면 지역마다 일출과 일몰의 특성이 있고 해가 뜨고 지는 위치도 계절에 따라 바뀐다. 이를 잘 숙지하고 출사에 임해야 한다. 춥기도 한 데다 어스름은 대개 일출 30분 전 정도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 정도 시간 여유를 잡고 물의 정원에 도착하니 이미 어스름이 끝나고 날이 밝아오는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날에는 더 일찍 일어나 어스름 촬영에 도전했다. 맑은 날이어서 어스름 찍기에 딱이었다. 이날은 성공. 초승달과 별까지 조연으로 출연한(?) 멋진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

물의 정원

연초에 강화도 동막해변에서 담은 어스름도 장면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날은 일몰을 찍으러 동막해변까지 갔는데 구름이 많은 관계로 해가 지는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 헛수고를 한 셈이다. 하지만 구름 낀 날씨의 어스름을 어떨지 기다려봤다. 예상치 못했는데 어스름의 빛깔과 해변을 비친 가로등의 불빛이 어우러져 정말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코발트 빛깔의 바다와 가로등에 비친 백사장, 그리고 그 위의 많은 발자국들. 바라볼수록 음미하는 맛을 자아내는 풍경을 가슴에 담았다. 수 많은 발자국들은 바다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담아 갔을까.


동막 해변


다음 사진은 제주도에서 찍은 어스름의 정취다. 바다에 그 시간의 독특한 색감이 담겨 있다.

제주도
제주도 
제주도 

다음 사진은 베트남 호위안에서 맞은 어스름. 가득한 등불과 어스름, 그리고 베트남의 전통 주택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빛 잔치에 와있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베트남 호위안 야경 

어스름. 새벽에 보는 빛은 다가오는 하루를 기대감으로 맞게 해 준다. 저녁에 보는 어스름은 보내는 하루를 뒤로 하며 무언가 그리움과 애절함이 녹아있는 듯하다. 허전하기도 하고 '세상의 진공'으로 가는 경계의 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보일듯 말듯한 시간에 알듯 모를듯한 감성이 묻어난다.


박두진 선생은 앞에서 올린 도봉의 어스름을 쓸씀함으로 풀어냈다.


도봉(道峯)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어스름은 가끔 어린 시절로 생각의 시계 바퀴를 돌려주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등생 시절 어둑해질 때면 나는 동네의 작은 골목길에서 먼 데를 계속 쳐다보곤 했다. 직장에 가셨던 어머님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누구인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어 어른이 나타나면 유심히 다가오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몇 분이 지나가다가 마침내 어머님이 나타나면 “엄마~‘하고 뛰어가 품에 안기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어린 마음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 엄마‘는 이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셨고, 그 어린아이는 어스름을 사랑하는 중년이 되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보름달이 휘영청했던 어스름, 그 사진으로 이 글을 맺는다.

인천 앞바다 무의도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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