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드러난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글로벌 문제 해결을 위한 리더십의 부재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글로벌 이슈가 터지면 미국이 앞장서서 국제 공조의 틀을 만들어 ‘산불’을 진화하던 일은 이젠 과거지사가 됐다. 미국은 2014년에만 해도 세계 67개국과 ‘글로벌 보건 안보 구상(Global Health Security Agenda)’을 시작하는 등 보건 분야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이번에는 미국 스스로가 국제적 협력을 위한 분위기를 깨트리고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 ‘역리더십’의 모습을 보였다. 무역 갈등을 봉합해 중국과의 휴전에 들어갔던 미국은 ‘중국바이러스’, ‘우한바이러스’라는 명칭을 되풀이해 사용함으로써 코로나19 발원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중국을 자극했다. 이에 중국은 미군이 중국에 바이러스를 퍼트린 의혹이 있다며 거친 말에 거친 말로 응수했다. 양국 관계는 공조는 커녕 균열의 길로 치달았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유럽 국적자의 입국 금지를 발표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놓고 G7과 G20가 화상회의를 했지만 리더십의 부재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탓이다. 이렇듯 코로나19의 확산 과정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사실상 공백 상태에 들어가자 중국이 이를 치밀하게 비집고 들어가고 있다. 중국은 사태 초기에만 해도 발병 제보자를 오히려 처벌하고 관련 정보를 은폐하는 등의 모습으로 국제적 불신을 자초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진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상황에서 미국이 대응에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자 코로나19의 ‘불길’을 잘 잡은 모범적 국가로 자국을 포장하며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 리더십’의 깃발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코로나19 사태 초기에만 해도 마스크와 의료장비를 수입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어려운 유럽 등 다른 국가들에 이를 수출하고 있다. 중국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이탈리아에 산소호흡기 1천 개, 마스크 2백만 개, 방독 마스크 10만개, 방호복 2만 점, 검진 키트 5천 개를 보내기로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EU국가들은 이탈리아가 마스크를 포함한 의료품목을 긴급 공급해줄 것을 요청했는데도 자국의 필요 물량 확보를 위해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이탈리아의 반응은 ‘EU 비판, 중국 칭찬’이다. 이탈리아의 EU 대사인 마우리지오 마사리는 “이탈리아는 이미 의료기기 공급을 위해 EU의 ‘시민보호 장치’를 가동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나라도 이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중국만이 쌍무적으로 응답해오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은 이란에 의료팀을 파견하고, 마스크를 지원했다. 세르비아에도 의료 품목을 공급했다. 알렉산다르 부치지 세르비아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유럽의 연대는 ‘소설’ 같은 얘기라며 중국만이 자국을 돕는 유일한 국가라고 중국을 추겨 세웠다. 중국의 해외 지원에는 알리바바의 창업자인 마윈도 나서고 있다. 마윈은 미국에 대규모 검진 키트와 마스크를 보내기로 했으며, 아프리카 54개국에도 검진 키트 2만 개와 마스크 10만 개의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이 이처럼 의료 품목 지원에서 앞장서고 있는 것은 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이들 품목의 대부분을 중국이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19 확산 이전에도 세계 마스크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코로나19 사태이후 생산량을 12배 이상 늘렸다. 중국은 또 의료 근로자 보호에 필요한 N95 방독 마스크의 절반가량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생제의 대부분도 중국에서 제조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의 상황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필요한 품목의 국내 생산이 수요에 턱없이 부족하다. 중국에서 사다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중국 수입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실상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미국의 전략 비축 물량을 보면, 이번 팬데믹 사태에서 필요한 마스크와 방독 마스크의 고작 1%, 산소 호흡기 10% 정도만을 보유하는 데 그치고 있다. 나머지 물량은 중국에서 수입해오거나 국내 생산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항생제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미국 시장에서 중국제 항생제의 점유율은 95% 이상에 달하고 있다. 특히 항생제로 원료는 미국 내에서 생산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G1이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의료 품목 생산에서 중국에 절대 열세인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이 이번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갈등만 심화시켰을 뿐 리더십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 행정부 하의 미국은 지난 2014년과 2015년의 사스 사태 당시만 해도 10여 개국 회의를 소집해 사스 확산 억제를 위한 국제 공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트럼프는 G7과 G20회의에 참석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는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는 호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지역의 10여개 국가들의 관료 수 백 명과 화상회의를 가지면서 자국의 코로나19 방역 경험을 공유했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미국과 중국의 입장 차이는 코로나19 이후의 국제 질서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미국의 리더십이 적지 않게 훼손됐다는 점이다. 세계적 위기 상황 속에서 국제 공조를 주도해 위기 돌파의 해법을 실행해온 미국의 전통적 리더십은 실종됐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효율적,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미국 의료시스템이 가진 문제점만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곤경에 처한 다른 나라를 돕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나름대로 리더십을 보였다.
미국의 리더십 약화와 중국의 선전. 코로나19 이후의 국제 판세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미국의 위신이 깎이고 중국이 상대적인 우위를 보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의 대응 방식의 차이가 바로 글로벌 세력 판도의 본질적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경제 규모 면에서 미국은 아직은 부동의 1위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의 2019년 명목 GDP 추정치를 보면 미국이 21.4조 달러로 1위, 중국이 14.1조 달러로 2위이다. 두 나라의 GDP 격차는 지난 2014년의 7조 달러에서 7.3조 달러로 조금 더 커졌다. 지난해까지는 미국 경제가 11년째 활황 국면을 이어간 반면 중국 경제는 미국의 무역보복 조치의 영향으로 성장세가 꺾인 탓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중국의 위상이 다소 강화될지는 몰라도 미국과의 경제적 격차가 좁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더구나 중국은 이번 사태에서 정보 은폐 등을 일삼음으로써 스스로가 신뢰도와 투명성이 높은 대국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경제적 덩치만 컸지 소프트 리더십은 취약한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코로나19 이후 국제질서를 점쳐보는 데 있어 가장 우려되는 변수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고조이다. 코로나19 발생 이전만 해도 미·중 양국은 18개월 동안 끌어온 무역전쟁을 일단 정지시키는 ‘1단계 휴전’에 합의한 상태였다. 미국은 중국 제품에 대해 물리는 관세율을 낮춰주고 추가적인 관세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이에 부응해 중국도 향후 2년 동안 2천억 달러어치의 미국 제품 및 서비스를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순항하는 듯하던 양국 관계는 코로나19사태를 거치면서 다시 악화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 바이러스’, ‘우한 바이러스’ 같은 명칭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중국 책임론을 부각시켜 왔다. 중국은 발끈해 미군이 중국에 코로나19를 퍼트린 의혹이 있다며 맞서고 있다. 음모론에 바탕을 두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장군멍군식의 ‘말싸움’이 이어지면서 양국은 다시 감정적 대립 상태에 놓여 있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19 사태가 종료되면 두 나라의 무역전쟁은 휴전 상태에서 다시 ‘교전 상태’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리더십에 상처를 받은 미국이 선제적으로 중국에 싸움을 걸어갈 공산이 있다. 중국이 경제적 충격으로 인해 미국에 약속했던 미국 제품 구매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좋은 빌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탈 글로벌화의 움직임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두 가지 점에서 글로벌화가 세계 경제에 가져온 심각한 위험요인을 부각시켰다. 먼저 국가 간 장벽이 낮아지면서 이동이 활발해진 점이 바이러스가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확산되는 토양이 되었다. 또 전 세계가 공급 체인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외부적 요인으로 공급 충격이 발생할 경우 각국 경제가 순식간에 마비될 수 있음을 절감하게 됐다. 실제로 IMF의 분석을 보면, 지난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0년 동안 국제무역 증가량의 73%는 공급체인 안에서의 거래로 나타났다. 글로벌화와 공급체인의 세계화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긴 하지만 이번에 심각한 위기를 경험한 만큼 위기관리 차원에서 각국 정부와 기업이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탈 글로벌화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특히 미국은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보고 대중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크다. 주요 품목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고, 중국 등 해외에 진출해 있는 미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리쇼어링을 강화하는 대책 등이 예상해볼 수 있는 수순이다. 중국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미국의 무역보복 조치를 경험하면서 대미 의존도가 높은 첨단 기술과 부품 등의 자체 개발 및 생산 확대에 자원을 총투입하고 있다. 특히 공급체인의 경우 자국에 우호적인 나라들에 집중시켜 리스크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할 것을 관측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 두 개의 블록으로 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랜 기간 진행돼온 글로벌화인 만큼 단시간에 완전한 디커플링은 어렵겠지만, 미국은 G1으로서의 지위 방어와 중국 견제를 위해, 중국은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력갱생하기 위해 상호 의존도를 낮추는 ‘분리’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경제 냉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참고자료>
Foreign Affairs(2020. 3. 18), ‘The Coronavirus Could Reshape Global Or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