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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Mar 03. 2019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견딘 다산 정약용의 인간 승리

다산 잠언 콘서트 '내가 살아온 날들'

18년 간의 귀향 살이. 40세부터 57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유배지에서 보낸 천재.

세상 밖으로 버려져 오랜 시간 고립돼 있던 그는 고난의 시기를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을 자신의 학문을 심화시키고 저술활동을 하는 기간으로 활용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 이 글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루고자 함이 아니다.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 동안 무너지지 않고 선비로서의 기개를 지키며 꿋꿋하게

버틴 그의 상상을 넘어서는 인내심, 즉 '마음의 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약용은 22세에 초시에 합격했고, 28세에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해 벼슬길로

나아갔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특히 1801년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천주교도들을 탄압한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참수당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된다. 1801년 3월 천주교도의 책장에서 정약용 집안의 서찰이 나온 '책롱 사건'으로 인해

정약용도 경상도 포항의 장기로 유배됐다가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장소를 옮긴다.  

18년 간의 귀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정약용의 입장이 돼 생각해본다. 인생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벼슬 길이 막힌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참수되거나 유배됐으며, 가문은 폐족이 되었다. 귀양 살이는 끝이 없이 이어졌으니 희망조차 사라진 상황. 더구나 가족이 있는 경기도 광주의 마현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강진에서 속절없이 고독한 고난의 시간을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도 인간이기에 마음은 출렁거렸지만 스스로를 다잡으며

책을 읽고 저술활동을 하는 학문 세계로 더 깊게 탐닉했다. 유배 기간이 그의 학문 세계를

구축한 기간이 된 것이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에 실린 그의 서한과 글에는 그의 올곧은 정신세계와 마음 가짐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아침에 햇볕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먼저 지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것이 진리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난 때문에 청운의 뜻까지 꺾여서는 안 된다'(하피첩)



탐욕을 절제하고 현재를 즐기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한 인간으로서 다산의 철학적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가버린 곳은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은 기약하지 못한다. 천하에 지금 눈앞의 처지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높은 집과 큰 수레에 목말라하고 논밭에 애태우며 즐거움을

찾는다.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죽을 때까지 미혹을 못 떨치고 오로지 '저것'만을

바란다. 하여 '이것'이 누릴 만한 것임을 잊은 지가 오래되었다'(어사재기)



다산은 스스로가 고난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백성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가득하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려운 이웃 백성들을 잘 챙길 것을 당부한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혁명적이다.

'다 같은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까지 아울러 가져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그래서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그 질서를 바로잡았으니 바로 정(政)이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을 때 한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그곳에서 첫 4년을

보내게 된다. 정약용은 자신이 머물던 주막집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의 사의재(齋)로 지었다. 그 네 가지는 맑고 담백한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과

신중한 행동을 말한다. '엄숙한 용모'는 좀 그렇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다산을 따라 하고 싶은 덕목이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으로 정해진 유래는 이렇다. 정약용은 1808년 봄에 강진 만덕리 율동의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차나무가 많아 다산으로 불리는 이 산야에서 살게 되면서 정약용은 '다산'을 자신의 호로 정한다.



다산은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 48권을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9월 14일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 마현의 집으로 돌아간다.  한 천재의 올곧은 삶도 75세에 이곳에서 마감된다.

이 책을 읽으며 다산은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삶에 대한 그의 철학과 태도에서도 귀감이 되는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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