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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Mar 02. 2019

"욕망의 무한정 충족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소유인가 존재인가(에리히 프롬 저)

소유인가 존재인가. 사회심리학의 개척자 에리히 프롬이 던지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 자체에 답은 주어져 있다. 답은 '존재'이다. 그런데 매일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질문에 시험문제 답안지 쓰듯 '존재'라고 자신있게 적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속 마음은 '소유'이면서도 답은 '존재'라고 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소유와 존재 사이 그 어딘가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세상의 흐름을 좇아 소유 쪽에 더 가까이 가 있을 수 있고,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는 존재 쪽에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위치에 있든 내면의 요구는 '존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소유와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존재'를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삶. 에리히 프롬의 글을 요약, 정리해본다.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의 길도 아니며,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도 되지 못한다.


슈바이처가 1952년 노벨상 수상 시 한 말.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가진 초인은 초인적 이성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욱 더 허약한 사람이 된다. 우리가 초인이 될수록 우리는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아야 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발휘하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생존 양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소비는 걱정을 경감해준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만족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또 그들이 나아가서 반응케 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어떤 것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물질적 소비의 대변자이자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의 대변자이다. 예수는 존재의 대변자이자 소유하지 않음이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이념의 대변자이다. 


에크하르트
'하나님이 역사하기에 적합하자면, 인간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자신의 소유물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정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이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전과 주체의식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모든 탐욕은 포만점이 없다. 왜냐하면 소비가 그것이 극복하려고 의도된 내적 공허감, 권태, 외로움, 침울 등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곧 우리가 갇혀 있는 자기중심이라는 감옥을 뛰쳐나오는 것, 그래서 세계에 도달하고 세계와 우리 자신을 하나로 하는 것이 그 길이다.


진정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 길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에의 갈망, 특히 우리의 자기집착을 제거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새로운 인간>
-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한다.
-축재와 착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줌과 공유함으로써 오는 기쁨을 느낀다.
-탐욕과 미움, 환상을 될 수 있는 한 최소로 줄이도록 노력할 것.
-인간 실존의 비극적 유한성을 받아들인다.
-순진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천치같이 바보스럽다고 불리지는 않는다.
-꼭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야망을 갖지 않으며, 그러한 야망은 탐욕과 소유의 또 다른 형태를 말한다.


후기 중세 문화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따랐기 때문에 번영했다. 근대사회는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와 나라의 성장이라는 비전에서 활력을 얻었기 때문에 번영했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비전은 바벨탑의 비전으로 타락되었다. 이제 그 바벨탑은 붕괴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궁극에 가서는 그 폐허 속에 모두를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후세 중세사회의 정신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인 사고 및 과학의 발달과의 종합이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런한 종합이 존재의 나라(City of Being)인 것이다.


'소유의 삶'인가 '존재의 삶'인가. 프롬의 얘기를 따라가노라면 답은 '존재의 삶'임을 알게 된다.

문제는 이를 실제 삶으로 옮겨가는 데 있다. '소유의 삶'에 길들여져 있기에 '존재의 삶'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도 염려와 근심이 닥치면 금새 '소유의 삶'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이렇듯 뒷걸음질이 반복되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기도와 성찰,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소유의 삶'에는 평안에 없고, '존재의 삶'만이 평안을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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