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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May 09. 2019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 적은 '각자도생' 한국

며칠 전 또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빚 7000만 원에 일가족 극단적 선택’. 안타까운 내용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기가 좀 그렇다.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은 없었을까.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이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이 엇갈린다.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이 땅에서 적어도 이런 ‘절규하는 죽음’은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복지체계가 삶의 벼랑 길 위에 선 취약계층을 껴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생기면 늘 던져보는 질문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460258


매년 발표되는 ‘세계 행복 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가 있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이 매년 세계 각국의 행복 상태를 측정해 발표하는 보고서이다. 2019년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54위에 랭크됐다.(지난해의 57위에서 세 계단이 올랐다) 세계 156개국에서 54위에 올랐으니 높은 수준에 들어가는 편이다. 상위권은 대부분 북유럽 등 서구 국가이다. 중동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에선 대만(25위), 싱가포르(34위), 태국(52위)이 우리나라보다 행복 순위가 높다. 반면 일본(58위)과 중국(93위)은 우리보다 낮다. 행복한 국가로 알려진 부탄은 95위에 그치고 있다. 부탄은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https://worldhappiness.report/ed/2019/

국가별 행복도는 1인당 국민소득, 평균수명, 사회적 도움, 선택의 자유, 관대함(기부), 부패 등 변수를 기준으로 갤럽이 설문 조사를 해 측정한다. 이 변수들을 내용을 들여다보니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27위), 평균수명(9위), 관대함(40위)은 순위가 높지만 사회적 도움(91위), 선택의 자유(144위), 부패(100위)는 낮은 순위에 그치고 있다.      



이중 사회적 도움(social support)은 ’ 어려울 때 언제든 필요하면 도와줄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느냐 ‘는 질문을 던지고 ’ 예=1‘, ’ 아니오=0‘의 수치를 부여해서 점수를 매긴 다음 국가별로 순서를 매긴 것이다. 이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 156개국 중 하위권인 91위에 머물고 있다. 세계에서 9번째로 오래 살고 27번째로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인데 한 개인이나 가족이 어려울 때 곁에서 도움의 손길을 줄 친척이나 친구가 많지 않은 서글픈 현실인 것이다.     


소득 수준 상승과 물질문명 탓에 개인주의가 확산해 그런 걸까.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다른 선진국들은 ’ 사회적 도움‘ 항목의 순위가 높다. 호주(7위), 캐나다(20위), 미국(37위), 독일(39위) 등이다. 아시아권에서도 대만(48위), 일본(50위)이 우리보다 순위가 높다.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더 심한 ’ 각자도생‘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인생의 절벽에 섰을 때 곁에 서 줄 친구나 친척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그래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족들이 잇따르고 자살률이 높은 나라. 물론 국가는 사각지대가 최소화되도록 촘촘히 복지체계를 짜야한다. 하지만 어려운 주변 사람을 돕는 공동체 문화가 실종돼가는 현실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철학자 박이문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 따라서 마음의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회 구성원, 나아가 우주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보다 더 이타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도가 높은 ’ 각자도생‘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저 구석으로 몰려가는 이타주의를 다시 무대에 올려 ’ 안타까운 죽음‘을 줄이는 최소한의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건 국가의 정책 이슈가 아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의식 전환과 실행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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