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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May 08. 2019

거대담론만큼 중요한 '일상의 행위'

#아파트 입구, 한 아주머니가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데 그녀의 손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가 쥐어져 있다. 입구에 있는 쓰레기를 지나치지 못하고 손수 주은 것이다.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따라가며 보니 분리수거하는 곳까지 가서 쓰레기를 버린다. 돌아서는 표정을 보니 참 표정이 선한 분이다.   

  

#지하철. 장애인 한 분이 볼펜을 놓고 간다. 이런 일들이 종종 있는 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아저씨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낸다. ‘그래 나도 사자’하고 지갑을 보니 잔돈이 보이질 않는다. 그냥 만 원짜리를 꺼냈다. 옆자리 아저씨는 그 장애인이 앞으로 오니 볼펜을 돌려주며 천원도 같이 쥐여주었다. 장애인은 “그러면 안 된다”라며 볼펜을 주려 했지만 결국 옆자리 아저씨 뜻대로 상황이 정리됐다. 나도 볼펜을 사려했지만, 장애인이 잔돈이 없다고 해 돈을 주지도 볼펜을 사지도 못했다. 미안했다.     



거대 담론이 넘친다. 공방이 뜨겁고, 날 선 말이 오간다. 각자가 지향하는 목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인데 방법론은?? 물론 한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거대 담론, 매우 중요하다. 그게 잘못되면 우리의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 모두가 잘살고 존중받는 사회로 가는 길을 잘 찾아가는 ‘사고의 향도’를 잘 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 거창한 얘기들도 일상에서 긍휼과 배려가 있는 작은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에 그칠 수 있다. 말은 우아한데 현실적 삶이 그 멋진 말과 괴리가 있다면 그 말대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말과 다른 행위에 의해 세상은 더욱 오염될 수 있다.     



2000년 초 유학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출국 전에 내가 겪은 일을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서울 이수교 일대. 저녁 무렵 퇴근 시간대였다. 교통체증이 아주 심한 시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교차로 꼬리물기 단속이 없던 때였다. 신호가 바뀌어도 멈추지 않고 교차로에 진입해 바뀐 신호에 따라 진입하려는 차량의 진로를 막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이날은 유독 이게 심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몰리는 차량이 교차로에서 서로 꼬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교통경찰이 한 대 한 대 차량을 유도해 빼내면서 그 난리법석을 수습해야 했다. 새벽녘이 돼서야 교통이 정상화됐다고 들었다. 서로 약속을 지키면 느리지만 그래도 차량 흐름은 이어졌을 일이 이렇게 망가져 버린 것이다.     


다시 미국 얘기로 돌아오자. 장소는 시애틀. 어느 날인가 운전을 하는데 신호동이 고장이 났다. 이런 상황이면 서로 가려는 차 때문에 교통체증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교통경찰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차량 흐름이 원활한 것 아닌가. 교차로에 접근하면서 보니 먼저 온 순서대로 서로 양보하며 차량들이 차례차례 교차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나에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특히 출국 전에 겪었던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미국을 사대주의로 보는 관점이 아니다. 우리를 비하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미국민의 시민의식이 미국을 끌어가는 저변의 힘임을 눈으로 확인했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행히 우리도 요즘은 시민의식은 크게 성숙됐다. 교차로가 엉망이 되는 그런 일은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장면들도 종종 목격된다.      



이 글에서 인용한 사례들은 일상에서의 배려, 긍휼, 질서의식 같은 가치가 거대 담론보다 밑에 있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방향타를 잡는 거대 담론도 일상에서의 작은 행위들이 흐트러져 있으면 사상누각일 수 있다. 아파트에 들어서는 마주친 한 아주머니의 작은 선행 앞에서 나 자신도 되돌아보고 우리 삶의 큰 울타리인 사회를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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