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 얘기지만 사람은 사람 속에 존재한다. 의식 속에서 고독 속에 빠져들 수도 있지만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희로애락의 여정을 거쳐 가는 것이 삶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만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관계의 속성이 어떻든 기대하는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나도 그랬다. 기본적으로 예의와 품격이 중시되고, 상식과 원칙이 존중됐다. 사람이다 보니 틀어지고 긴장된 관계도 있을 수 있지만 서로 공감하고 지키려 하는 공통영역은 넓게 존재했다. 그걸 의심치 않고 살아왔다.
지난해 끔찍했던 경험을 하면서 이 상식적인 기대가 다 깨졌다. 예의와 품격, 상식과 원칙이 외면당하는 상상 밖의 세상이 존재했다. '비정한 집단'은 한 개인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입으로는 ‘정의’를 얘기하지만, 행위는 정반대였다. 추구하는 게 ‘올바름’이면 방식도 ‘올바름’이어야 한다는 기대는 한낱 서생의 순진한 생각에 불과했다.
라인홀드 나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모순적 구조가 떠올랐다. 나버는 얘기한다.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 이 말 그대로였다. 아니 이 말은 그래도 품격이 있는 표현이다. 내가 직면했던 현실은 언어적 표현을 초월했다.
수직 낙하하며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 삶이 멈춰 섰다.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영혼의 어두운 밤’에 갇혀 있었다. 집단이 한 개인에게 남긴 내상은 깊고 깊었다. 말 그대로 한 번 한 번 숨을 쉴 때조차 트라우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벌써 1년. 돌아보니 역설적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사람’으로 치유되고 있다. ‘절망’ 앞에 직면해있을 때 손을 내밀어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끄집어내 준 게 사람들이다.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와 가족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누가 시나리오를 짜놓고 진행하듯 여기저기에서 지인들은 물론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이 전화로, 글로, 만남으로 위로와 격려를 담은 따뜻한 마음을 불어 넣어주었다. 한두 달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런 만남이 죽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는 기자다’라는 책을 내면서도 사람에 감동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삶이 무슨 인상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겠는가. 역시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내온 한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나의 억울함에 마음 아파하며 명예 회복을 위해 그동안 살아온 길에 대해 책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나로서야 반길 수밖에 없는 좋은 기회였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을 해줘 가능한 집필이었다. 집필 후 이 지인은 제작부터 홍보까지 정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정말 감사했다. 책을 알리기 위해 나와 이 출판인은 여러 언론사를 접촉했다. 또 한 번의 큰 감동이 찾아왔다. 20여 개의 언론사가 흔쾌히 서평을 써주었다. 지면을 크게 할애해준 미디어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홍보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열매를 거두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지워지고 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로 새까맣던 ‘그 상황’이 잊혀져 가고 있다. 사람 때문에 망연자실했던 마음에 사람 덕분에 새 살이 오르고 있다. 사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