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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Jun 24. 2019

평안도 아바이

아버지는 평안도 분이시다. 평북 정주군 곽산면에 일가가 사시다가 6.25 전쟁의 와중에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가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다가 함께 모인 곳이 전주다. 어릴 적 어르신들이 평안도 사투리로 대화 나누던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 아버지와의 거리는 늘 적당히 멀었다. 너무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서기엔 부담스러운 그런 사이. 칭찬은 가물에 콩 나기이고, 주로 아버지에게서 듣는 얘기는 훈계조나 꾸지람이었다. 한 번은 아버님이 정성스레 키우시던 선인장 화분을 뒤엎었다가 혼이 나갈 정도로 혼난 적이 있다. 그래도 이건 관심을 보이시는 순간이고 대부분 부자 사이엔 대화가 없었다. 그래서 어릴 적 내 가슴엔 아버지의 모습이 잘 인화되어 있지 않다.     



나는 전주에서 자랐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학교 3년 내내 입시 준비를 한 후 마침내 손에 땀을 쥐며 전주고교 입학시험을 봤다. 합격자 발표 날. 중학교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시험도 잘 본 것 같아 합격을 확신했다. 합격자 명단이 나붙는 전주교 교정에 굳이 가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좀 늦더라도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명단을 확인해주니까. 담임 선생님께서 그래도 직접 가서 보라고 권유했다. 40분 이상을 걸어 전주고 교정에 도착했다. 멀리 익숙한 뒷모습의 남성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눈이 뚫어지게 합격자 명단을 훑어가고 계셨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니 아버님이셨다. 낯선 장면이면서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 아버님이 사실은 내 일에 저리 관심이 있으셨구나... 그때의 감상을 시어로 풀어낸 글이다.    


 

아버지     



눈앞 선하다

눈 단장한 교정 한 구석

자전거 세워 둔 중년     



그 아슬아슬한 탐색

햇빛으로 쓰인 합격자 이름들

아, 저기 내 아들

이십 년 실향의 아픔 환하게 녹아내린다     



늘 먼발치 무뚝뚝한 모습

마음이 닿기 어려웠던 평안도 아버지

그가 언 땅에 뜨겁게 서 계셨다

부모님 사진

 

고교 시절은 지금 돌아보면 한 순간에 지나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정해놓고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시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별다른 가족사의 추억도 없다. 지금도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은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경험이 내 진로의 반을 결정했던 것이다. 북한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오신 두 분은 그 트라우마 탓인지 내가 법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자식을 법관으로 키우고 싶어 하던 다른 집의 분위기와 정반대였다. 공산당이 내려오면 법관은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된다는 식의 말씀이셨다. 다행히 내가 희망했던 전공이 경제학이어서 지원할 학과를 놓고 집에서 별다른 논의는 없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때는 박정희 정권의 말기인 1979년. 첫 학기부터 대학 교정은 반독재 시위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세상의 불의에 눈을 뜬 나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됐다. 민주화를 향한 꿈도 잠시. 전두환 노태우를 주축으로 하는 군부는 정권을 찬탈했다. 학생들은 저항했고,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목소리는 대학 재학 중 내내 이어졌다. 나도 그 대열에 섰다. 이북 출신이어서 보수적이셨던 아버님. 성인이 된 아들은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자신의 주장을 펴며 아버지와 충돌했다. 어느 날 폭음을 하고 들어오신 아버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자식에 대한 서운함을 표시하시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왜 그리 아버지에게 대들었는지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학 재학 중 아버님은 내가 시위에 참여한 문제로 두 번 서울로 오셔서 학교에 아들을 잘 훈계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해야 했다. 졸업식 날에 “축하한다”는 말 대신 “질렸다”라고 하신 아버님의 말씀은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업한 후에는 석 달에 한 번 정도씩 전주에 내려갔던 것 같다. 나도 직장 생활을 하는 성인이 됐기 때문에 아버님과의 거리는 많이 좁혀졌다. 식사 자리에서 아버님과 반주를 같이 할 정도가 됐으니 어릴 적에 비교하면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첫차를 구입하고 가족들을 보러 내려갔던 때가 생각난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아버님께서 너무 흐뭇하셨던지 손수 손 세차를 하고 계셨다. 세월은 가슴을 여는 힘이 있나 보다. 아버님은 거리낌 없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셨다.      



나의 평안도 아버지는 1995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업이 기울면서 병을 얻으셨다. 64세에 돌아가셨으니 너무 일찍 세상을 뜨신 것이다. 손 세차해 주시던 모습 같은 아버님과의 추억이 내 가슴에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대학 시절 굳이 아버님과 이념 논쟁을 하며 지지 않으려 했던 내 모습이 내내 죄송하다. 부자간의 그런 차이라는 게 뭐 그리 뜨겁게 논쟁할 일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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