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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Jul 25. 2019

'백범일지'를 통해 다시 보는 일본

백범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다시 읽었다.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관계에 긴장이 높아지고 가운데 일본 강점기의 한복판을 헤쳐간 백범의 삶을 반추해보고 싶어서였다.      


  

백범의 글은 솔직 담백하고, 구체적이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조국을 짓밟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는 강렬하고 일관되다. ‘존경스럽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상권은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된 후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어린 두 아들인 인과 신에게 ‘아비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유서 대신 쓴 글이다. 하권은 미국에 있는 동포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포부를 밝히려곤 쓴 책이다. 백범은 하권 역시 유서라고 밝히고 있다.     



백범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창암’이었으나 18세에 동학에 입도하면서 이름을 ‘창수’로 바꿨다. 21세 때 일본 육군 중위로 살해해 모진 고문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23세인 1898년에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 백범은 본명을 감추고 ‘김구(金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백범은 1908년에는 안창호 등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1911년에는 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38세인 1913년에 한자 이름을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정한다. ’백범‘은 가장 미천한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이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지어진 호이다. 백범은 1931년(56세)에는 특수비밀 결사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독립투사를 양성했으며, 1940년(65세)에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됐다. 69세인 1944년에는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인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해 국내 진공 작전을 짜기도 했으나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11월 27일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귀후 후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남북한 총선에 의한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야인생활을 하게 된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백범은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74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다. 대한민국이 한 거목을 잃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백범은 유연하고 개방적이다. 신학문을 접하고는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해야만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에도 백범은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것보다는 사랑, 평화, 문화의 힘을 강조한다.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며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간 가슴이 넓은 사고이다.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를 겪은 백범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글에 잘 표현돼 있다.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 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위로는 정무 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일본은 한국을 제 것으로 오래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았다”   


  

백범 일지에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만나 ‘거사’를 기획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술돼 있다. 목숨을 던지는 독립투사의 나라 사랑과 저항 의지가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다. 백범은 이 책에 비판적으로 본 인물들에 대한 평도 곁들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가 금전 문제에 대해 죄를 묻자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해 버렸다“”김원봉, 김두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엣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터라 임시정부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의열단원들이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     



백범 못지않게 백범 모친의 삶도 글을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백범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백범의 모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의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고 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돈으로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요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 돈으로 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놓으셨다“ 이런 어머니였기에 백범 같은 거목이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갑자기 찾아온 조국의 광복. 백범에겐 기쁜 소식만은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고 백범은 말한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모두 허사로 끝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조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실행도 못 하고 왜놈이 항복했으니 그동안에 기울인 노력이 아깝기도 하려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적인 발언권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백범의 계획대로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된 후에 광복이 이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백범이 우려한 점이 그대로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발언권이 약화한 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어서이다.(우리나라는 패전국인 일본의 전쟁 책임과 배상 문제를 논의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 경제의 숨통을 조르겠다는 듯 비수같은 수출규제 조치를 꺼낸 일본. 개탄스러운 이 상황 속에서 ‘백범일지’를 통해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를 다시금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의 한일 관계를 분석하며 ”무계획적인 화해와 불충분하게 설계된 합의가 퇴보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과거는 흘려보내고 미래로 가는 게 맞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이유로 무역을 정치화하고 국제 공급사슬을 무기화한 일본의 일방적 행위가 바로 미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일본이 이성을 되찾고 외교적 해결의 장으로 나오는 게 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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