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의 숨통을 겨누고 있는 아베의 치졸한 경제 보복. 단순히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보긴 어렵다.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꺼낸 칼이 한국 경제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어서이다. 핑곗거리로 삼은 원인과 대응 카드의 비대칭성. 이게 일본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핵심이다. 아베에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한 일본 저널리스트의 끈질긴 취재가 이 질문에 대해 추론 가능한 답을 주고 있다. 교도통신 기자 출신인 프리랜서 기자 아오키 오사무가 쓴 ‘일본회의의 정체’. 이 책은 아베 정권의 탄생이 단순한 새로운 정권의 출범이 아니라 패전국 일본으로서의 전후 체제를 깨트리고 헌법 개정을 통해 천황 중심, 자민족 중심의 군사 대국으로 가려는 일본 우파의 집요한 계획에서 이뤄진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책 제목에 명확하게 드러난 것처럼 아베 뒤에는 ‘일본회의’라는 우파 조직이 있다. 아베 내각 각료 19명 중 15명(총리 아베 신조, 재무 장관 아소 다로, 총무장관 다카이치 시나애 등)이 일본회의에 소속돼있다. 사실상 각료들의 배출처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반수가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지방에는 ‘일본회의 지방의원 연맹’을 두고 있다. 회원 수만 3만 8천여 명에 이른다. 이쯤 되면 일본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자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자 아오키는 현재 아베 정권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회의 등 우파 조직은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숭배 ▲현행 헌법과 전후 체제의 타파 ▲‘애국적’ 교육 ▲‘자학적’(우파 입장에서 본) 역사관의 부정 등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힌다. 아오키는 일본회의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일본회의의 실무적·이론적 핵심에는 전후 일본의 우파운동을 지지한 신흥종교인 ‘생장의 집’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으며... 동원·자금·영향력 등 여러 면에서 일본회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이 신사 본청을 정점으로 하는 신사계이며, 여기에 여러 신흥 종교단체의 측면 지원까지 더해진다.”
“그들은 현행 헌법과 그것이 상징하는 전후 체제를 노골적으로 혐오하며 어떻게 해서든 무너뜨리고자 한다... 일본회의는 ‘표면적인 얼굴’로 우파계의 유명한 문화인, 경제인, 학자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모습은 ‘종교 우파단체’에 가까운 정치집단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 회의에는 신사 본청과 메이지신궁,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신사 외에도 신도계와 불교계 등 다수의 종교단체가 임원을 파견하는 등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회의는 종교 우파 조직이며 상당히 제국주의적 주장을 하며 전쟁 전으로 회귀하고자 한다고 고발한다.
일본의 양식 있는 사회 지도층들이 최근 수출규제의 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문의 제목은 ‘한국의 적인가’하는 질문이다. 수출규제에 이어 우리나라를 안보상 우호국인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려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이 질문에 ‘한국은 적이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베 정권의 뒤틀린 이 같은 인식은 일본을 움직이는 ‘일본회의’를 실체를 보면 그 뿌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본 회의는 1997년 5월 30일에 결성됐다. 두 우파 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해 출범했다. 일본회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단체를 살펴봐야 한다. 먼저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일본의 공식 연호를 기록 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원호 법제화 운동’ 등을 추진한 단체이다. 정계, 재계, 학계 등의 인사들이 회원이었다. ‘일본의 지키는 모임’은 성격이 상당히 독특하고 음습하다. 우파계 종교단체가 중심이 돼 결성했다. 신흥 종교단체인 ‘생장의 집’이 이 모임에 주축으로 참여했다. ‘생장의 집’은 천황 주권, 현행 헌법의 파기와 메이지 헌법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해왔다. 생장의 집 정치연합(생정련)을 결성해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종교단체의 또 다른 축인 신사 본청은 신도정치연맹(신정련)을 만들어 역시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간부직을 맡고 있는 신정련 국회의원 간담회는 참여 의원수만 304명에 이른다. 일본 전국의 8만여 개의 신사를 둔 신도와 신사계는 엄청난 자금력과 동원력을 가지고 있다. 신사 본청은 천황 중심주의와 헌법 개정, 야스쿠니 영령에 대한 국가의례 확립 등을 주장하는 극우 성격의 단체이다.
이들 우파단체들이 하나로 합쳐진 일본회의. 그 실체가 요즘 드러났지만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본 사회를 바꾸려고 한 흔적은 곳곳에 있다. 이들은 1979년에 일본의 공식 연호를 기록 방법으로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1992년에는 과거에 대한 사죄로 이어지는 천황의 방중에 반대하고, 1995년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정권의 사죄 결의에도 반대했다. 2006년에 첫 출범했던 아베 정권이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슬로건으로 내건 건 이런 맥락의 표현이었다. 저자는 강조한다. “아베 정권과 일본회의가 지금 총력을 기울이는 최대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증오하는 전후 체제의 상징이요 핵심이며 원흉인 것의 타파, 즉 현행 헌법의 개정이다” 2015년 11월 10일 도쿄에서 열린 ‘지금이야말로 헌법 개정을! 1만 명 대회’에서 아베 총리는 ‘자민당 총재 자격’이란 꼼수를 써서 한 영상 연설에서 “헌법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다. 이 정신이 일본 전체로 확대되도록 앞으로도 전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참의원 선거를 끝낸 아베 정권이 헌법 개정에 ‘올인’할 것임을 예고해주는 대목이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라는 극단적인 카드까지 써가며 수출규제의 전선을 넓히는 것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강제징용 배상에 대한 보복이라면 양국 간 대화를 통해 외교적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를 견제하고 군사대국화로 가는 길에 한국의 발목을 잡아두려는 저의가 있다면 향후 일본의 태도를 통해 충분히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어떤 의도가 있든 천황 중심의 전쟁 전 체제를 회복하려는 종교 우파단체에 뒷받침되고 있는 아베 정권은 두고두고 한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 질서에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듯하다. 한일 갈등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대응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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