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부루마 저
일본의 경제 보복을 경험하면서 한 가지 절실하게 느낀 점은 일본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36년의 아픈 상처를 준 나라이고 때로는 이웃처럼 때로는 ‘먼 나라’로 거리감을 두고 느껴온 나라. 저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인권 자유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말 그대로 누구나 공감하는 기준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저들은 왜 그 가치를 등지고도 저리 떳떳한 것일까. 역사의 교훈을 잊은 것으로도 모자라 한국 경제의 숨통을 노리고 칼을 겨눈 저들은 누구인가.
일본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을 읽어나가고 있다. 이번에 손에 잡은 책은 네덜란드인 이안 부루마가 쓴 ‘근대 일본’. 네덜란드는 사실상 가장 먼저 일본의 문을 연 서양의 국가이다. 일본은 1630년대 이래 나가사키에 있는 작은 인공섬 테지마에 한해 소수의 네덜란드 상인에게만 교역을 허용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은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갔으며 란카쿠(蘭學, 네덜란드의 학문)이 생길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네덜란드 출신인 이안 부루마는 일본 역사의 권위자이다.
리 제독이 일본의 개항을 목적으로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당시 일본은 천황은 상징이었을 뿐 쇼군이 이끄는 도쿠카와 바쿠후(幕府)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일본의 선택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였다. 1853년~1868년의 기간은 페리 입항 후 쇼군 체제가 무너지기까지의 바쿠후 말기이다. 이 기간에 남서쪽 영지인 조슈, 사쓰마, 도사는 사카모도 료마는 인물의 중재로 연합 전선을 형성해 바쿠후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한 나라에 두 통치자가 있을 수 없다며 천황제도를 옹호한다. 1868년부터 1869년에 바쿠후 충성주의자들과 천황군이 격렬한 내전을 벌여 천황군이 승리한다.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다.
1868년 3월 메이지 천황을 구심점으로 한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다. 같은 해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내건 최초의 헌법이 제정된다. 이 헌법은 프로이센 헌법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서구문물을 활용한 일본의 경제개발도 본격화된다. 1857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강소가 세워졌다. 일본의 산업혁명은 영국에 뒤지긴 했지만, 독일보다 몇 년 정도 늦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은 두 번의 전쟁 특수를 통해 성장의 계기를 잡는다. 한 번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일본은 당시 배를 만들고 옷감을 수출하고 산업기계와 군수품을 유럽에 공급하는 등 특수를 누렸다. 다른 한 번은 한반도에 참화를 가져온 6·25전쟁 특수이다. 다른 나라의 불행이 경제성장의 기회가 됐으니 이것만 생각해도 일본은 겸손해야 할 일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었다. 1940년 1년 미국은 이런 일본에 선박 운항 연료와 철강 판매를 중단한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남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다. 그러자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기로 한다. 이후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은 마침내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그리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일본의 항복 이후 이어진 전후 처리 과정은 미국의 타협적 태도로 인해 어정쩡하게 이뤄지고 이게 두고두고 문제의 불씨가 된다. 미국은 공산국가인 소련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을 활용하기로 하고 천황을 정치적 상징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당시 호주와 영국, 소련은 천황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맥아더는 천황이 없으면 일본의 통치가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히로히토 천황가의 가족조차 히로히토 퇴위를 통해 전쟁의 책임을 지는 것을 원했지만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맥아더는 다만 천황에게서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신비감을 제거하기 위해 신토 의식과 국가 업무를 분리해 천황이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만 남도록 했다. 이 한 개의 사진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45년 9월 천황이 미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셔츠의 옷깃을 풀고 뒷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있는데 천황은 딱딱하게 굳어 서 있다. 힘의 균형이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저자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천황제를 보호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에 대한 문제, 제국주의 이상과 아시아인들에 대해 저지른 범죄 사이의 관계 등은 은폐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아베는 얼마 전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郎) 전 외무상의 묘를 찾은 자리에서 “드디어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추진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전날에는 전범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묘도 찾았다.
‘근대 일본’에는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인물평이 많이 나온다.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으로 진주만 공격 당시 상공 대신을 지냈다. 전쟁 기간 중 군수품에서부터 강제 노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의 책임 아래 있었다.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난 ‘강제 징용’도 그의 책임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는 나치와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데 찬성했으며, 전후 복역 중에도 일본이 ‘정당한 전쟁’을 했을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1957년에 총리가 된 기시는 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함께 골프를 치며 헌법개정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이젠하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한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행적이 아베의 모습에 그대로 오버랩되지 않는가. 헌법 개정을 위한 집요한 시도, 골프 외교 등등이.
일본의 현 정치제는 ‘(19)55체제’로 불린다. 1955년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에 맞서 보수진영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으로 통합된 해이기 때문이다. 통합의 주역은 기시 노부스케였다. 이안 부루마는 자유민주당이 돈으로 세워졌다고 고발한다. “건설회사, 범죄 집단, 기업, CIA 뇌물, 무역회사에서 선거비용이나 정부 보조금의 연계망을 통해 돈이 들어왔다”“자유민주당의 금고는 매번 새로운 건설 계획이 세워질 때마다 그에 따라오는 뇌물과 상납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라고 증언한다.
일본의 정치제제는 종교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도 문제점이다. 아베 정권을 움직이는 ‘일본회의’ 뒤에는 토착종교인 신사와 생장의 집이 있고,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토착 불교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
이안 부루마가 쓴 ‘근대의 일본’은 일본을 잘 아는 서양의 전문가가 일본 역사의 흐름을 훑으며 객관적으로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력은 주고 있다. 특히 현재 아베 정권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이념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아오키 오사무가 쓴 ‘일본회의의 정체’와 같이 읽으면 일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