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사건과 서북청년단.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 p328~329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 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요가 발생한 이 지역에서 한 달 동안의 의무 근무기간이 끝나면 재배치되어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다........(중략).....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번 보고(<일일 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 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중략).....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번 보고(<일일 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12월 20일 서북 청년단원 200명이 비밀리에 대전에 있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갓 도착한 제9연대에 배속된 이들은 즉시 군복을 지급받았다.' 이들의 복무는 서북청년단 지도부와 제2 여단장 간의 은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주한 미 육군 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27일~1948년 12월 28일 (No. 1023, 1948. 12. 28. 보고)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 <작별하지 않는다> p317
* "북조선의 빨갱이도 김일성이도 다 우리와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 참가차 북한으로 가기 전 남긴 말 - 오소백 저 <인간 김구> 중 : https://youtu.be/Nl2zqqlBwmg (백범 김구 선생과 암살범 안두희)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김병희 편저,『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증언을 들어보니 그들은 신천 지역 교회의 청년들이나 젊은 지도자들로서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동키(Donkey) 부대’라는 유격대를 조직하거나 일시적인 자체 ‘치안대’를 조직해서 한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세력들을 모두 이 잡듯이 잔인하게 잡아 죽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면서 언덕에서 함께 뛰어놀거나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이좋게 놀던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을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그들은 보복을 피해 대부분 월남해서 한국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랐으며 특히 그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 혹은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이 많아 한국 기독교 교계의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중에는 개신교 최대 교단의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지낸 목사와 장로들도 여러 명 있었다.
나와 대화할 때 살펴본 바로는 자신들의 행위를 지금도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히려 공개적인 대중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학살 행적이 마치 전장에서의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나 한 듯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이나 한 듯 공산당을 때려잡았다는 식의 무용담처럼 자랑을 일삼아 왔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온통 반공주의 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이 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로서 반공 투사가 된 그들은 신성한 교회 강단을 반공 강연장과 본거지로 둔갑하게 만들거나 자신들이 속한 교파와 교단에서는 절대적으로 친미를 주장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신봉하여 왔던 것이다. 아무리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보복성 살인이라 해도 그렇게 많은 숫자를 살해하고도 털끝만큼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수히 절망했었다.
월남한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에 독점하고 있는 선교사회를 통해 남한 기독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경직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교섭해 교회 설립 기금 10만 달러, 학교 설립비 5만 달러 등 총 1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 외에도 장로회신학교 복구비 4만 달러 등 총 19만 달러를 지원받아.. 1949년 10월 경에는 서울ㆍ경기 지역에서만 총 44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장로회를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이북 신도 대표회의였다... 이북 신도 대표회는 1952년부터는 전국적인 조직이 되었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장로회 총회에서 거의 40% 정도의 권력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남한 교회 편입이 완료되자, 1953년 총회에서 이북 신도 대표회 소속인 명신홍과 한경직이 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장로교를 장악했다.
/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 2021) p108~112
'내가 외도 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학살은 이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했었고, 옛날 장터에서도 했었어요. 총으로 쏘면은 금방 죽지 않고, 요런 듸 맞고.... 그러면 철창으로 찌르고 그랬죠. 장터에, 옛날 묵은 장터 있었는데, 글로(그쪽으로) 달아나다가 (사람들을) 대창으로 찌르던, 그런 기억이 나요. 젤 무서웠던 건 그 모가지 전봇대에 단 거,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그때 하나 둘 잡아오면 좀 높은데 달아 놓았어요. 지서 정문에.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한번 달면 며칠 달아 두는 거죠.
/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한울> p110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 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로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代殺한 거야.
/ <작별하지 않는다> p218
겨우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붙잡혔어.
...제주읍 부두에 있는 주정 공장에 보름 동안 갇혀 있다가 목포항으로 실려갔대. 선창작에서 기다리던 육지 경찰이 즉석에서 수감자와 형량을 알려줬대.
...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작별하지 않는다 p 219~220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극우단체가 2014년 9월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강제로 철거하려 한 사실에 대해, 당시 조국 서울대 교수는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전위부대로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한 집단이다.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조직원이었다”며 극우적 행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성냥을 그었다. 그러나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아올랐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P325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신경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뭐 썩는거지
....그렇게 삼 분에 한 번씩 이걸 하는 거야. 이십사 시간 동안 간병인이 곁에서
...얼마나 오래 이렇게 해야 해?
앞으로 삼주 정도.
-작별하지 않는다 p40~41
"3살 때 서귀포 서홍 리장이었던 아버지를 군인들이 아무런 죄 없이 끌고 간 뒤로 볼 수 없었다"며 "그동안 아버지 없이 생활해 온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온다" - 아버지 故강문택 씨 유해를 근 70여 년 만에 찾아 4.3 평화공원에 봉안한 강인화(73‧여)씨 인터뷰 내용 중: "제주 4.3 유해 유가족 상봉"/노컷 뉴스 ( 2018.11.22)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