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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Mar 23. 2021

회피 대신 도전으로 이끄는 도움 한스푼

  고작 과자 간식에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듯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다. 작은 것에 기뻐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새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녀석들로 인한 미소는 조금 뒤 깊은 한숨으로 바뀌어버렸다. 먹보 요정들의 기쁨이 휘젓고 간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얀 가루가 잿더미처럼 식탁 위, 아래, 의자 주변에 내려앉았다.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지는 과자를 주었더니 정도가 심했다.  다 먹고 나면 각자의 그릇만큼은 설거지통에 넣는 녀석들이 그날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탁을 전쟁터로 만든 주범들이 거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한 짓을 잊은 채 아예 드러눕기까지 했다. 여덟 살 라온이는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프다 하고, 여섯 살 로운이는 오줌이 나올 거 같다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이리 와서 그릇을 치우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둘의 행복한 시간을 지켜주기로 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안 했다는 것만큼은 알려주고자 명랑하게 외쳤다.

  “그래! 오늘은 엄마가 정리해주지 뭐.”

  “엄마,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꼬마 형제는 손가락으로 서로를 찌르면서 답했다.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전 같으면 노는 것을 멈추고 달려와서 그릇만이라도 치웠을 텐데 이렇게 말로만 때우다니! 한 살 더 먹으면서 자란 키만큼 영특함도 자란 모양이다. 마냥 작고 귀엽게만 봤는데 나름의 처세를 키워나가는 중이라니 반가운 변화였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마냥 순박하게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아무렇지 않아 하면 곤란하다. 뻔뻔해서는 안 된다. 마음 한구석에서 약간의 찔림 정도는 느껴야만 한다. 과연 녀석들 양심 상태는 어떤지 점검하고 싶어졌다.

  “그래! 이렇게 너희들 대신 정리하면서 엄마가 복을 쌓지 뭐.”

  내가 평소에 자주 해주는 말이 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일을 하면 복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고. 그제야 녀석들이 일어나 앉았다. 나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서 건강한 양심이 보였다. 나는 따뜻하게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많이 받았지. 엄마가 큰 복을 받은 것이 지금 눈앞에 있어. 뭐게?”

  “<우리 집에는 꼬마 철학자가 산다>?”

  “그것도 복이지. 그런데, 지금 말하는 건 다른 거야.”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

  “그것도 복은 맞는데, 지금 말하는 건 다른 거야.”

  나의 저서들을 복이라고 하는 로운이. 어떻게든 답을 맞히고파서 이런저런 답을 더 내놓았다. 내가 거듭 고개를 젓자 아쉬워하며 답을 알려달라고 했다. 동생이 그렇게 애를 쓰는 동안 라온이는 몹시 궁금한 얼굴을 한 채 듣기만 했다.

  “바로바로 김라온, 김로운이야. 너희들은 정말이지 너무나 멋지거든. 방금도 봐봐. 엄마한테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했잖아. 이렇게 좋은 아이들이 엄마에게 와주었다니!”

  나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복들이 하회탈처럼 웃었다. 곧이어 로운이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엄마, 그런데 안 좋은 아이랑 엄마도 있어?”

  동생의 물음에 라온이가 어이없는 질문이라는 듯한 말투로 냉큼 말했다.  

  “당연히 있지!”

  “그래. 얘들아. 그런 사람도 있지.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안 좋은 부모에게는 안 좋은 아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지.”

  “맞아!”

  내가 부연 설명을 해주려던 찰나 라온이가 먼저 맞장구를 쳤다. 녀석의 생각이 궁금했다.

  “라온아, 왜 안 좋은 부모에게는 안 좋은 아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음…… 음…… 몰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함이 넘치고 선명했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아졌다. 혹시 내 말을 흡수하기만 했던 걸까? 나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건 좋지만 내 뜻을 무조건 따라주는 건 원치 않는다. 무엇이건 자신만의 견해를 갖고 자유롭게 말하는 아이면 좋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라온이는 나름의 생각이 분명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확신에 찬 태도로 대답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다만 대답하기를 꺼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녀석이 정리해서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귀찮으면 ‘몰라’라고 하는 것을 요 며칠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집요하게 묻지 않았었다. 녀석의 말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주면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보아하니 그냥 둘 일이 아님을 느꼈다. 회피하는 습관으로 굳어지려는 과정에 접어든 것 같았다.   

  살다 보면 불편함에 맞닥뜨리는 순간은 언제든 찾아온다. 라온이와 로운이가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도전을 우선 생각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아직은 어리기에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맞서야 한다면서 무조건 등을 떠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오히려 뒷걸음질을 재촉할 수 있다. 부담 대신 기꺼움을 안겨주며 자연스레 도전하고 싶게 해줘야 한다.

  “엄마가 말했었나? 라온이랑 로운이는 참 멋진 아이야. 장점이 참 많아. 장점은 좋은 점을 말해. 너희들의 장점이 뭐가 있을까?”

  “킥보드 잘 타는 거!”

  동생이 먼저 말하자, 라온이도 서둘러 덧붙였다.

  “정리 잘하는 거!”

  “그래, 그것들 모두 다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의 장점이지. 지금 말해주고 싶은 장점은 ‘왜 그런 거야?’라고 엄마가 물었을 때 생각해보고 대답해주려는 점이야. 이런 질문을 들으면 대답 안 하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라온이랑 로운이는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노력하잖아. 그건 정말이지 큰 장점이야. 라온아, 엄마가 다시 물어볼게. 왜 안 좋은 부모에게는 안 좋은 아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라온이가 “음…….”이라면서 머릿속 막연한 생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뗐다.

  “아이들이 부모님한테 배우니까 부모가 안 좋으면 아이도 안 좋지.”

  이런 주옥같은 생각을 묻어두려 했다니! 야무지고 똑 부러진 대답이었다. 불편함을 깨버린 여덟 살의 빛나는 도전에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열렬한 환호를 해주었다.

  “그래, 그렇겠다. 와우! 얘들아, 우리가 지금 나눈 이야기가 너무 멋지다. 이 이야기도 엄마 다음 책에 꼭 써야겠다!”

  “신난다!”

  내가 라온이에게 준 한스푼의 도움은 자신이 얼마나 멋진지를 일깨워주고, 그것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녀석은 그것을 앙 삼켰고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역시 멋진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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