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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Oct 10. 2021

군대에 대한 동심의 기막힌 해석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고른 인형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한 달이 넘도록, 거의 매일. 내가 이야기 창작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즉흥적으로 만들어냈지만 꿈과 희망, 모험과 재미까지 담은 동화였다. 눈곱 요정 이야기, 별과 밤하늘이 서로 역할을 바꿔 본 이야기, 이불들의 축하 파티, 계절 요정 이야기……. 아이들은 지금껏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독특한(?)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나와는 많이 다른 남편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새로이 만드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다. 그림을 그린다면 뭐든 앞에 두고 보면서 그리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온전히 머릿속에서 그릴 대상을 만드는 상상화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여덟 살 라온이는 아빠표 이야기를 내게도 전해주었다.

  “엄마, 아빠가 엄청 재미있는 얘기 해줬어. 깡총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헬스장에 간 이야기야.”     

  “엄마, 아빠가 어제는 뽀삐가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를 달렸던 얘기 해줬어.”     

  남편의 이야기는 주인공을 인형으로 했지만, 사실은 매일 새벽 운동을 하는 자신의 일상을 들려준 것이었다. 창작이 아닌, 순도 100%의 자전적 이야기였다. 

  며칠 후 문제가 생겼다. 매번 운동했던 얘기만 해주다 보니 라온이가 지겨워했다. 결국, 남편은 새로운 소재를 다뤘다. 그 이야기 역시 라온이가 내게 소개해주었다.

  “엄마, 아빠가 어제 해준 이야기는 무서웠어.”

  “그래? 어떤 이야기였는데?”

  “삐약이가 군대에 간 이야기”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 샘물이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무서웠다는 걸 보니 납량 특집스러운 군대 이야기를 해줬던 걸까? 여덟 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공포물은 좀 이른 감이 있는데 말이다. 어떤 부분이 무서웠는지 라온이가 마저 말해주었다.  

  “군대에 가면 2년 동안 엄마, 아빠랑 따로 살아야 한대. 두 살 더 먹을 때까지 그래야 한대. 아......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워. 난 군대 가기 싫어!”

  “그래서 무섭다는 거구나. 라온아, 그건 아주 나중의 일이니까 미리 걱정하지 말자.”

  “아잉. 그래도 무서워.”

  내 품에 얼굴을 파묻는 녀석을 꼭 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며칠 뒤, 라온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아빠가 또 군대 얘기해줬는데 나 이제 군대 얘기 안 무서워. 재미있어!”

  “그래?”

  “응. 군대에 가면 엄청 좋아. 축구도 막 하고, 금요일에는 빵도 나온대! 정말 좋지?”

  가장 좋아하는 놀이로 '축구'를 꼽고, 내가 간식으로 빵을 주면 박수까지 치며 환호하는 녀석에게 군대는 환상적인 곳이었던 게다. 축구와 빵 외에도 라온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멋진 일이 있었으니…….

  “그리고 만약에 군대에서 밥을 남기면 운동장을 뛰어야 한대. 그것도 엄청 좋지? 막 신나게 달리기를 할 수 있잖아. 그건 건강에도 좋잖아.”

  밥을 남겼다고 핀잔을 듣는 대신 신나게 달리기를 할 수 있다니! 축구 못지않게 달리기를 사랑하는 라온이에게 '연병장 돌기'는 벌칙이 아닌 선물과 같은 일이었다. 내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녀석은 나도 군생활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기대에 차서 웃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심의 시각에서 펼쳐진 군생활 해석은 생각할수록 기막혔다. 한편으로는 삶의 중요한 깨달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시각을 달리하면 피하고만 싶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어디든 천국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이의 능력이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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