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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Mar 19. 2021

버려진 양심들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

  어린 두 아들과 같이 있는 상황에서 낯선 이와 다툼을 벌일지, 말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아주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회정의 실현과 관련된 문제였다. 나는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때마다 한 가지 바람이 피어올랐다.

   ‘제발 오늘은 이 자리에 아무것도 없기를.’

  하지만 이루어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당연히 비어 있어야 할 그 자리엔 어김없이 빨간 수레들이 있었다. 마트에 있어야 할 것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몰지각한 사람들이 버려놓고 간 양심의 흔적이었다. ‘마트 수레 반입 금지’라는 안내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놓는 뻔뻔함이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마트까지는 걸어서 8분 정도 걸렸다. 태양이 이글거리던 어느 날, 마트 직원 둘이 아파트 입구에서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기차처럼 길게 연결된 수레를 옮기는 것이 매우 힘들어 보였다. 한 사람은 수레 앞쪽에서 방향을 잡으며 끌고, 다른 사람은 뒤에서 힘껏 밀었다. 타는 듯한 공기 속에서 가쁜 숨을 헉헉 내쉬는 그들의 턱밑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땀으로 샤워를 한 그들의 모습에 내가 다 미안했다. 이 아파트 주민인 것이 부끄러웠다. 마트 직원들은 그렇게 매일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리 지독한 날씩여도 와야만 했다. 사라진 수레들을 챙기러.

   나는 아파트 입구를 지날 때마다 라온이와 로운이에게 말했다. 저 수레들이 원래는 마트에 있어야 하는 건데, 나쁜 사람들이 자기만 편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라고. 그것은 훔친 거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마트 직원이 고생한 모습에 대한 목격담도 빠짐없이 전했다.
   여섯 살, 네 살 형제는 빨간 수레들을 볼 때마다 한마디씩 했다.

  “엄마, 저기 또 수레 있다. 하아…….”

  “엄마, 또 마트 직원들이 힘들게 가지러 오겠다.”

  “그러게나! 정말 왜들 그러는 걸까? 너무 나쁘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온이가 다급히 내 손을 끌어당겼다.

   “엄마, 저 사람 수레 끌고 왔어! 가서 안 된다고 말해!”

  우리로부터 30미터쯤 앞에 있는 여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건이 가득 담긴 마트 수레를 밀고 가는 중이었다. 사실, 라온이가 말하기 전부터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운이까지 내 팔을 흔들었다.

  “엄마, 빨리! 수레 끌고 왔잖아. 가서 안 된다고 말해!”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을 봤을 때, 가서 무엇이 올바른지 알려주는 것이 온당한 행동이다. 어린 자식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이상 좋은 교육이 있을까?
   하지만 나는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일단 그녀의 인상을 살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무랄 데 없이 깔끔했다. 턱을 위로 치켜들고 걸어가는 모습엔 도도함이 풍겼다. 그녀가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렸을 때, 얼굴도 확인했다. 입을 굳게 다문 그 표정으로 주위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 같았다. ‘나 건드리면 안 좋을 줄 알아!’라고.

  그녀가 아파트 입구를 지나 단지 내부 길로 들어섰다. 아마도 집에 물건들을 내려놓고 빈 수레만 아파트 입구로 가져올 계획인듯 싶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라온이가 “엄마, 빨리!” 하며 내 손을 끌어 그 여성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제야 나는 입을 떼서 최대한 침착하고도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잠깐만, 라온아. 저 사람한테는 얘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어. 엄마가 보니까 아마 말을 해도 안 들을 거야. 마트 수레를 여기까지 갖고 오면 안 된다는 건 누구나 당연히 알아. 저 사람도 잘 알아. 그런데도 저러는 걸 보면 아무리 말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오히려 우리에게 마구 화를 낼지도 몰라. 엄마는 라온이와 로운이를 보호해야 하거든. 저 사람 때문에 너희들이 그런 안 좋은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어.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꼬마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자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과 수레를 보며. 내 손을 힘없이 쥔 채 걷는 아이들의 손끝으로부터 실망과 혼란이 오롯이 전해왔다.
   아이들을 말렸을 때의 나는 차분한 태도를 보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앞으로 자식에게 무엇이 옳은지 알려 줄 자격이 있는 걸까? 나는 내 눈앞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막거나 올바르게 이끌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더 안타까운 건 아마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이 그런 내 모습에 익숙해지리라는 것이다. 정의를 위한 일임에도 뒤로 물러나는 행동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보장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타인의 그릇됨을 볼 때마다 섣불리 나설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정의와 상식이 늘 통한다면 고민할 일도 아니겠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옳은 언행을 했다가 오히려 험한 꼴을 당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일로 다시금 깨달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감내하며 정의를 이루어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반면 나는 그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님을.
   집에 돌아오자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맑게 인형을 쌓아 놓고 깔깔거리며 놀았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의 무기력함에 실망하고, 아이들에게도 속상함을 안겨줘야만 할까? 그건 또 싫었다.
   심란함을 달래고자 <논어>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몇 장 넘기니 전에 이미 읽었던 한 구절이 유난히도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얘들아, 아까 마트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못 해서 답답했지? 엄마도 그랬어.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게 될 거야. 놀이터에서도 볼 수 있잖아. 과자 봉지나 휴지 같은 쓰레기가 바닥에 있을 때가 있지? 사실 거기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누군가는 그렇게 해버렸어. 그걸 볼 때마다 우리가 ‘하아! 도대체 왜 쓰레기를 여기 버리고 간 거야?’라고만 생각하면 답답할 뿐이거든. 그럴 때는 공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행동하면 좋아. 공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
   나는 논어 구절을 읽어 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현명한 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며,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스스로 반성한다.”
- <논어> 중에서        


  “그러니까, 못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일단, ‘나는 그랬던 적이 없었나?’하고 반성해본 다음에,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해야 해. 아파트 입구에서 마트 수레를 봤을 때도 어떻게 한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는 거지. 우리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만큼은 꼭 올바르게 행동하겠다고 다짐하고 실천까지 하자.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도록 우리가 모범을 보여야 해. 그럴 수 있을까?”

  “응!”

  두 꼬마의 얼굴에서 암팡진 결의가 반짝였다.
 
   공자의 말 덕분에 ‘양심 불량’을 볼 때의 마음이 달라졌다. 전에는 ‘어이없음’, ‘답답함’,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행동을 돌아본 후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고자 즉, 올바르게 처신하겠노라 마음 먹는다. ‘성찰’, ‘올바른 다짐’ 같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뀐 것이다.
   라온이와 로운이도 연습 중이다. 다행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버려진 양심들을 볼 일이 종종 있다 보니, 연습 기회가 수시로 생겼다.

  “엄마, 저 사람은 빨간 불인데 건너갔어.”

  “엄마, 누가 여기에 쓰레기를 버렸어.”

  그때마다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한결같았다.

  “그러게. 옳지 않은 행동이지. 얘들아, 저런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다고?”

  “나는 저러지 말고, 바르게 행동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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