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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Sep 26. 2021

아이에게 들려주는 '희생'에 대한 좋은 예

 


 꿈나라로 가기 전 아빠와의 독서 시간. 남편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작은 목소리로 얌전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언젠가 그가 회사에서 고객의 전화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전화응대 친절도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결과지에는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아서 잘 안 들렸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면 코끼리가 되곤 했다. 라온이와 로운이가 낯선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말이다. 남편은 일단 언뜻 떠오른 대로 말해주었는데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 돌아오면 모드를 전환했다. 말하는 속도를 높이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온 집안에 울려 퍼지게 했다. 목에 핏대가 선명하게 선 채 말하는 모습에 저러다 목이 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마침내 아이들의 “알겠어.”나 “그렇구나.”를 들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차분히 책을 이어서 읽었다. 뜨거운 설명의 여파로 목소리가 갈라져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나오곤 했다.
   그야말로 열과 성을 쏟아낸 설명이었지만, 내용 면에서는 빈틈이 간간이 있었다. 내가 즉시 나서서 보완해주고 싶었지만 남편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기에 꾹 참았다. 나는 일부러 세 남자의 대화를 음악 듣듯 흘려들으면서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다 로운이의 질문 하나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빠, 희생이 뭐야?”

  “어…… 희생이란 고생하는 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거. 예를 들어서, 유치원 친구를 위해서 뭔가를 해주거나, 엄마가 설거지하는 날인데 아빠가 대신해주거나 그러지? 그런 걸 희생이라고 해.”

  로운이는 알겠다면서 다음 내용을 어서 읽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정정이 필요했다. 남편의 설명은 '희생' 보다는 '배려'의 뜻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당장 나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얘기해줄지 좀처럼 감을 못 잡았다. 사전의 도움 없이 나만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워낙 만만치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여섯 살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기준까지 지켜야 하니 난이도가 더 했다. ‘희생’은 특히나 신경 써야 하는 까다로운 단어였다. 결코, 가볍지 않은 데다가 살아가는 데도 상당한 의미를 지녔기에 대충 알려줄 수는 없었다. 
   어렴풋한 생각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더 파고 들어가야만 했다. 조금은 답답하긴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런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다. 비로소 정리가 되었을 때의 짜릿함을 알기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아이들이 침대에 누웠는데도 끝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날 밤은 자장가만 들려줘야 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참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날은 밤 10시에 지인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늦은 밤에 모임이라니! 온라인 화상 모임이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그리운 이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화상 회의가 활성화된 것은 그나마 좋은 점이었다.

  시작한 지 10년도 넘은 모임이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했기에 회원 간 우정이 끈끈했다. 단순 사교모임이 아니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건 개의치 않고 자유롭고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소위 인문학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어렵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친근하고 편하기만 하다. 매일 아이들과 맑고 순수한, 산소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눈높이가 비슷한 어른과의 깊이 있는 대화에도 목이 마른 나다. 이 모임은 그런 내게 오아시스와도 같다.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 긍정적인 응원까지 넘쳐나니 모임을 마치면 늘 치유가 된 느낌이 든다. 

  그날 참석자들에게 여섯 살의 눈높이에 맞춰 ‘희생’의 정의를 내려 보게 했다. 엉뚱하면서도 난감한 요구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의견을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모든 의견을 적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난 후 마침내 나만의 사전에 ‘희생’이라는 단어를 추가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얘들아, 어제 아빠랑 희생에 대한 얘기를 나눴었지? 혹시 희생이 뭐야?”

  로운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고생하는 거. 아! 대신해주는 거.”

  “그래, 그래. 희생이란 나의 기회나 이익을 누군가를 위해 포기하고, 고생도 하는 것을 말해. 예를 들어 어제 바나나가 두 개 있었지? 엄마는 배가 엄청 고파서 꼬르륵거렸거든. 하지만 바나나 먹는 걸 포기하고 라온이랑, 로운이에게 준 거야. 그래서 배고픔을 더 참느라 좀 힘들었지. 이런 게 바로 희생이야. 혹시, 라온이랑 로운이도 희생을 해본 적이 있어?”

  라온이가 당당하게 답했다.

  “나! 내 과자 로운이한테 나눠준 적 있잖아.”

  “나도 형아한테 유치원에서 갖고 온 장난감 같이 갖고 놀게 해 줬잖아.”

  “그래. 둘 다 아주 잘했어. 혹시 라온이는 그 과자가 없으면 엄청 힘든 거였어?”

  “아니.”

  “혹시 로운이는 그 장난감을 형이 갖고 놀면 로운이가 엄청 힘든 거였어?”

  “아니.”

  “그럼 그건 희생이라기보다는 배려에 가깝겠다. 배려도 아주 멋진 거지. 앞으로 살다 보면 때로는 희생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거야. 너희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야. 엄마랑 아빠도 우리 소중한 라온이, 로운이를 위해 희생을 하고 있지. 사실 아빠는 운동을 좋아하고, 늘 더 하고 싶은데 집으로 일찍 오려고 해. 집에 오면 좀 쉬고 싶지만 꾹 참고 너희와 노는 걸 우선으로 하는 거야. 엄마도 쉬거나 글만 쓰고 싶을 때가 많은데 꾹 참고 너희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지.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글 쓰잖아. 엄마도 자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야.”

  말을 하다 보니 남편과 나의 희생을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데,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예시 중 나의 아이들에게 가장 와닿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 아닐까? 또한 녀석들이 반드시 알 필요가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고 살았으니까 나한테 잘해!’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게 아니다. 내 아이들이 내가 범했던 실수를 하지 않고, 내가 겪었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고,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를 나는 늦게야 깨달았다. 아빠의 말기암 소식을 들은 후였다. 환자복을 입은 아빠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들을 기억 속에서 꺼낼 때마다 잊고 있던 소중한 사실들이 내 가슴을 쳤다. 그때마다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아빠와의 시간이 더 주어지기를.

  나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두 아들을 키우는 나도 그런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과는 다르게 행동하고픈 것이 있다. 묵묵히 희생하는 대신 내 자식들이 알아채게 할 것이다. 그렇게 부모에 대한 감사를 늘 품도록 도울 것이다. 이는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이끄는 일만은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요소인 '감사'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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