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대하는 라온이의 말투가 며칠 째 사나웠다. 주의시켜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더니, 급기야 어른에게도 버릇없이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방에서 단둘이 얘기 좀 하자며 손을 잡자 녀석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잘못에 대한 훈육이 펼쳐질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간 방문을 닫은 채 둘만 마주 앉았을 때는 꾸지람은 없고, 차분하게 대화가 오갔으며, 진한 포옹으로 마무리됐었다. 녀석은 그게 좋았던 게다.
“라온아, 엄마가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 얼마 전부터 우리 라온이가 동생한테도 툭하면 소리치더니, 아까는 이모한테도 좋게 대답하지 않고 ‘아까, 말했잖아!’라고 하더라고. 요즘 라온이 말투가 문제 있다는 거 알아?”
“응.”
순한 양 같은 표정에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라온이도 알다니 다행이다. 엄마가 또 궁금한 게 있어. 우리 집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 엄마도, 아빠도, 로운이도 다정하게 말하는 편인데, 라온이는 왜 그러는 거야?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걸 보니까…… 혹시…… 학교에서 누군가가 그러니?”
“응. OO이가 그렇게 말해.”
자주 들어 익숙한 이름이었다. 라온이에 따르면 심한 개구쟁이라서 담임으로부터 옐로카드를 많이 받는 아이였다. 녀석과 놀면서 자주 까르륵거린다던 라온이가 며칠 전에는 그 아이의 거짓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어떤 거짓말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기에 다음에 알려주기로 했었다.
“그렇구나. 그럼 OO이 말투를 따라 하는 것일 수도 있네. 엄마가 늘 말했었지? 놀이터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옆에 있는 동생들이나 친구들이 따라 한다고. 봐봐. 라온이도 따라 하는 거잖아. 이제 안 좋은 걸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곱게 말하도록 하자.”
“응. 엄마, 그런데……. OO이가 나한테 거짓말했던 거 생각났어!”
“그래? 뭔데?”
“자꾸 '김라온은 못생겼다.’, ‘김라온은 바보다.’라고 해. 하지 말라는대도 자꾸 해.” 얘기를 전하는 얼굴엔 학교에서 당시에 느꼈던 언짢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라온이 외에 다른 친구도 자주 놀린다고 하니, 아무래도 OO이는 고약한 장난을 즐기는 아이 같았다.
나는 기분이 안 좋았겠다면서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곧이어 라온이가 매우 멋지고 지혜로운 아이임을 확신에 찬 어조로 알려주었다. 녀석의 표정이 한결 나아진 것을 확인한 뒤에는 코를 찡긋하며 가볍게 말했다.
“라온아, OO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니까 그냥 무시하는 게 어때?”
“난……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무시를 해?” 일그러뜨린 얼굴, 낮게 깐 목소리, 한 글자씩 힘주어 또박또박하는 발음, 한마디 한마디마다 묻어나는 미세한 떨림……. 이 모든 것이 담긴 말이었다. 녀석은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던 것이다. 그 순간, 온전히 내 기준,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가벼운 장난으로 여기고 넘길 수 있다고 해서 이 여덟 살도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녀석의 내공은 아직은 누군가의 고약함을 무시할 정도로 단단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엄청나게 기분 나쁘고 속상했지? 충분히 그럴만 해. 아무래도 라온이가 알려줘야겠다. 앞으로 또 그러면 ‘OO야, 그건 장난이 아니라 괴롭힘이야. 그만해.’라고 말하는 게 어때?”
“좋아.”
라온이는 그제야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번 제안은 녀석에게 익숙했다. 라온이와 로운이의 장난이 지나치다 싶을 때 내가 종종 했던 말이다. 지금 멈추면 딱 좋다고, 계속하면 더이상 장난이 아니라 괴롭힘이 된다고. 그때마다 아이들이 내 말을 따라주었기에 늘 고맙고 기특했다.
기분이 풀린 라온이가 이어서 들려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OO이의 행동이 결코 가볍게 넘길 수준이 아님을 알았다. 녀석은 라온이를 매일같이 놀리는 말로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모자라, 도둑으로 몰기까지 했다. 자신의 만화 캐릭터 카드를 훔쳐 갔다며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다행히 라온이가 평소 모범적인 학생이었기에 억울하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아이가 부당한 일을 겪었다고 전하면 부모는 아이보다 몇 배 더 분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는 세상 무엇보다 든든하고 강력한 울타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잘잘못을 따지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콧바람을 거칠게 내뱉으며 몹시 분노한 얼굴로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뭐! 그랬단 말이야? OO이 이 녀석 진짜 가만두면 안 되겠네! 감히 우리 라온이한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나한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한테? 라온아, 아무래도 OO이에게는 아주 강하게 말해야겠다!”
역시나 나의 반응은 분노로 이글거리던 작은 눈동자의 불꽃을 즉시 꺼주었다. 라온이가 명랑하고도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엄마,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게 어때?”
“오! 어떻게?”
“‘OO야,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걸 미래에 네 아이가 될 아이가 지금 다 보고 있어. 그러니까 그만해.’라고.”
말투가 어찌나 다정하고 상냥하던지……. 친구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조언 같았다. 하지만 마냥 사랑스럽게만 볼 수 없었다. 솔직히, 우려스러웠다. 내가 그동안 녀석을 지나치게 해맑고, 순수하고, 바른 환경에서만 지내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라온이는 그동안 내가 애용(?)하던 방법을 친구와의 문제 해결에 적용하려던 것이다. 나는 우리 집 두 꼬마가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얘들아, 미래의 자식들이 지금 너희 행동을 다 보면서 ‘어? 우리 아빠 왜 저러지?’하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녀석들은 서둘러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라온이는 자신에게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친구에게도 통하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과연 녀석의 짐작대로 될까? 상대는 고약한 행동을 즐기는 아이인라면……. 라온이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일단 라온이의 제안에 호응해주며 녀석의 기를 살려주는 게 우선 이었다. “와우! 라온아. 너무 좋은 생각이다. 만약에, OO이가 그 얘기를 이해하고 잘못을 멈출 정도로 수준이 높다면 아주 좋은 방법이 될 거야. OO이 수준은 어때? 높아?”
“음……. 아니. 안 높아. 그냥 엄마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하는 게 좋겠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1단계로 그건 장난이 아니고 괴롭힘이라는 걸 말하기. 그래도 안 들으면 2단계로 이렇게 하자. ‘OOO!(성을 포함한 이름) 고약한 짓 그만해. 너 지금 못나 보여!’ 한 번 해볼래?” 라온이가 곧바로 따라했지만 말투가 문제였다. 다정하게 타이르는 말투였다. 다행히 내가 목소리 톤, 억양, 눈빛까지 코칭해주니 마침내 단호하면서도 상대를 한심하게 보는 마음을 담아 말하는 데 성공했다.
“옳지, 잘했어. 혹시 다른 친구들은 OO이가 괴롭히면 어떻게 했었어?”
“하지 말라고 하거나, 선생님에게 말한다고 했어.”
“그래, 대부분 그랬을 거야. 그래서 OO이가 친구들 말 들었어?”
“아니.”
“그렇지? 이제 좀 다르게 해야 해. 지금 엄마랑 연습한 대로 말한 친구는 아무도 없었잖아. 아마 라온이가 그렇게 하면 OO이는 놀라고 하던 걸 멈출 거야. 만약 안 멈추면 3단계로 ‘난 더 이상 너랑 얘기 안 할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하면 돼. 옆에서 그걸 본 친구들은 ‘어라? 저런 방법도 있네?’ 하면서 라온이처럼 해볼 거야. 라온이가 선구자가 되는 거지.”
나는 아이들에게 때로는 선구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선하거나, 올바른 일이라면 부끄러워하는 대신 앞장서서 하는 것이 멋지다면서.
“어때? 엄마가 말한 방법이 괜찮을 거 같아?”
“응!”
“앞으로는 그렇게 해보자. 라온아, 어떤 어른은 아이에게 모든 친구와 친하게 지내라고 하거든. 엄마는 아니야. 라온이를 괴롭히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하고는 안 그래도 돼. 그리고, 그런 짓을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해. 누구도 라온이에게 그러면 안 돼. 절대! 왠지 알아?”
“응. 나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한 송이 꽃이 피었다. 라온이는 양 손목을 맞대고, 두 손으로는 꽃받침을 만들어 제 얼굴을 그 위에 올렸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을 힘껏 안아주었다.
“맞아. 우리 라온이가 엄마 배 속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얼마나 정성껏 키웠는데! 늘 라온이가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면서 키웠단 말이야.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한 보물에게 감히 그런 행동을? 절대 안 되지!”
우리는 고약한 친구를 상대하는 1단계부터 3단계까지를 실제 상황처럼 몇 번 더 연습한 뒤, 손을 잡고 기분 좋게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도 녀석이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 훈련(?)을 시키고자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을 함부로 대할 때 단호히 거부하고, 중단시키며,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탈출시키는 연습 말이다.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뉴스 중 뜸하지 않게 나오는 게 있다.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대하며 처참하게 짓밟은 범죄 소식이다. 범행 수법은 충격적이라는 말만으로도 부족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가학적인 행동은 당하는 사람이 그냥 놔두면 더 심각해진다고 한다. 그러니 피해자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리면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싱그러운 초록 새싹 같은 아이에게 세상의 어둠에 대응하는 방법을 심어주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어둠이 점점 더 힘을 키우는 현실을 인정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그저 한숨만 짓고 있을 내가 아니다. 내 아이들에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훈련도 꾸준히 시키고자 한다. 바르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이끌기. 라온이와 로운이 같은 미래의 주인공들이 그런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 밝은 빛이 계속 퍼져서 어둠이 자리하던 곳도 밝음으로 채워 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