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신화 Nov 12. 2021

실수는 아름다운 도전으로 가는 기회란다

  초등학교 1학년생 라온이가 학교 숙제를 했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익힐 수 있도록 단어나 짧은 문장을 쓰는 것인데 구성이 알차서 흥미롭게 할 만했다. 여섯 살 로운이는 형이 숙제를 할 때면 옆에서 구경하거나 따라 하는 걸 즐겼다. 그날도 종이와 연필을 들고 와서 형 옆에 앉았다. 로운이의 한글 실력은 짧은 동화책을 천천히 혼자 힘으로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글자 쓰기는 아직 걸음마였다. 쓴다기보다는 그리는 것에 가까웠다. 녀석은 입을 야무지게 다문 채 자음들을 꾹꾹 눌러썼다. 아니 그렸다.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그림이었다. ‘기역(ㄱ)’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5초가 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로운이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엄마! 어떡해? 틀렸어!”
   앙증맞은 실수였다. ‘리을(ㄹ)’의 좌우가 바뀌어 있었다. 연필로 쓴 거라 지우면 된다는 나의 말에 로운이는 서둘러 지우개를 집었다. 문지르고 또 문질러서 종이를 다시 하얗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아직도 있잖아!”
   워낙 꾹꾹 눌러 쓴 탓에 종이에 파인 흔적이 남았다. 내가 지우개로 다시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이 자국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고 하자, 로운이가 울상이 되어 입을 씰룩거렸다. 나는 부드럽게 웃어준 뒤 그 위에 연필로 다시 쓰면 괜찮다고 해주었다.
   “난 이게 있는 게 싫다고! 깨끗한 게 좋다고! 으앙.”
   로운이는 절규하듯 외친 후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대게 내가 조곤조곤 설명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불편한 마음을 이토록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얼마 전, 한 지인과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려 해서 힘들어했다. 실수해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커갈수록 그런 성향이 강해졌다고 했다.
   혹시, 로운이의 깊은 곳에서 완벽주의자 기질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 여섯 살이 되어 깨어나기 시작한 걸까? 생각해보니 얼마 전부터 조짐이 스멀스멀 보이긴 했다. 기분 좋게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 그렸다면서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더 멋진 걸로 만들면 된다면서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녀석의 그림을 탈바꿈시켜주었다. 의자를 그리려다 실패한 그림은 계단으로, 세모를 그리려다 실패한 그림은 오징어로, 피자 조각을 그리려다 실패한 그림은 돛단배로……. 다행히 나의 손질을 로운이가 마음에 들어 했다.
 
  로운이는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실수의 흔적 때문에 목놓아 울어댔다. 순둥이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둥글둥글한 성격이었던 아이가 그러니 더욱 안쓰러웠다. 녀석을 휘감은 속상함이 스스로에게도 낯설고, 그것을 어떻게 다스릴지 모르기에 더욱 힘들 게 뻔했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녀석의 눈가와 볼을 닦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로운이가 이게 다 지워지길 바랐는데, 안 지워져서 속상했구나. 혹시 그거 알아?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운 자국이야. 로운이가 더 멋지게 해내려고 노력한 흔적인 거야. 엄마는 이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걸. 로운이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잖아. 어떤 걸 잘못해서 다시 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야. 잘못되었다고 포기하는 대신 그걸 기회로 만들어서 더 멋지게 되도록 도전하는 거잖아.”
   “난…… 이게 있는 게 싫다고. 깨끗한 게 좋다고.”
   “그래. 그럼 우리 새 종이에 다시 해볼까? 엄마가 종이 가져올까?”
   로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달리는 시늉을 하며 종이를 들고 왔다. 그리고, 꼬마 명필가가 글자 쓰기를 끝낼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다음 날, 가족이 모두 나들이에 나섰다. 내 뒷자리 카시트에 앉은 로운이가 신발을 벗겠다고 했고, 조금 뒤 '툭툭' 신발이 한짝 씩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엄마, 나 팔이 안 닿아. 내 신발 좀 가지런하게 해 줘.”
   “어, 그래.”
   나는 손을 뒤로 뻗어서 흩어져있던 운동화를 로운이의 발아래 바닥에 놓아주었다.
   “엄마, 제대로 딱 가지런하게 해 줘.”
   “더 가지런하게? 신발 앞뒤 끝을 딱 맞춰달라는 말이야?”
   “응.”
   또다시 완벽주의자적인 기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녀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면 청을 들어주면 그만이었을 테지만, 다른 방법을 택했다.
   “로운아, 기억해? 어떤 걸 혹시 잘못해서 다시 하면 그건 아름다운 일이라는 거. 잘못되었다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기회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일이라는 거.”
   “응. 근데 왜 갑자기 그 얘기를 해?”
   녀석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얘기로 느껴질 만도 했다. 단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달라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실수니 아름다움이니 도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음…… 우리 로운이가 뭐든 완벽하게 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왜 그 얘기를 하냐고?”
   목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자칫하면 녀석을 언짢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잘해야 했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라온이가 냉큼 나섰다.
   “왜냐면 네가 신발 이거 딱 맞추라고 했잖아.”
   유능한 대변인을 만난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의도를 명확하게 잡아내서 쉬운 말로 풀어 전달해주는 능력자! 든든했다. 답답했던 내 속도 시원했다.
   “그래, 로운아. 실수는 창피한 게 아니야. 모든 걸 어떻게든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아도 괜찮아. 혹시 이 운동화를 그냥 지금 정도로만 가지런히 모아 놓는 거 어때? 괜찮아?”
   “응.”
   
  그 후로도 로운이의 완벽주의자 기질이 뿔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오곤 했다. 날카로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다듬어 무디게 하는 요령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나는 ‘실수는 아름다운 도전으로 가는 기회’ 임을 거듭 알려주었다.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나의 말이 로운이의 머릿속에 서서히 스며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실수 때문에 울부짖는 모습을 더는 보지 않았다.
  이제 녀석은 자신이 그린 작품을 내게 보여줄 때 다음과 같이 자랑스레 말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원래 그리려고 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그냥 이렇게 바꾼 거야! 히히.”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일 때 만날 수 있는 색다른 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