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신화 Mar 20. 2021

동심에게 주고 싶은 ‘대화의 기쁨’

  휴일에 온 가족을 대동하고 온 아빠들이 실내 체육관에 모였다. 남편이 지인들과 가족 동반으로 배드민턴을 치기로 한 날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족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 ‘가정적인 남자’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들의 다정함은 처음 만나는 내게 편하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도 담겨 있었다.  

  나는 우리 집 두 꼬마, 그리고 다섯 살 여자 아이와 나란히 관중석에 앉았다. 그날 처음 만난 영빈이었다. 엄마는 어린 동생과 집에 있어야 했기에 아빠와 둘이 온 것이다. 아빠가 운동할 수 있도록 낯선 어른 옆에서 얌전히 기다려준 영빈이가 대견했다. 심심하기도 하고 어색함에 편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어른보다는 또래가 편할 터. 동갑내기 라온이가 살갑게 굴어주면 좋으련만, 녀석은 ‘수줍음 많은 아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기라도 한 듯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그것도 내가 시켜서 겨우 했다. 영빈이가 인사를 받아준 뒤, 눈을 껌뻑였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라온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곧 세 살배기 로운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유치원에도, 어린이집에도 다니지 않고 나와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로운이는 입을 야무지게 닫은 채 거머리처럼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수줍음으로 똘똘 뭉친 형제의 반응에 영빈이가 무안하지 않도록 내가 더 말을 걸었다. 동생의 이름도 묻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물었다. 영빈이는 동생에 대해 상냥하게 답해주었다. 그리고는 침묵의 두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배드민턴 코트로 시선을 옮겼다. 막 시작된 경기라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 이대로 침묵 속에 있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법 길었다.


  꼬마 숙녀를 재미있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약간의 긴장이 뒤섞인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웃는 얼굴이 매우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일단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까? <인간 관계론>의 저자 데일 카네기가 추천한 방법 중 하나를 써보기로 했다. 상대방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라온이는 유치원에서 산새 반인데, 영빈이는 무슨 반이야?”

  “사과 반이요.”

  “그렇구나. 라온이 유치원에는 산새 반, 소리 반, 난초 반, 국화 반, 무궁화 반, 목련 반이 있는데. 영빈이네는 무슨 무슨 반이 있어?

  “사과 반, 딸기 반, 수박 반, 참외 반, 체리 반, 포도 반이요.”

  “우와! 과일 이름으로 된 반이구나. 멜론 반이나 키위 반도 있어?”

  “아니요. 흐흐흐.”

  눈을 초승달처럼 뜨며 해맑게 웃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났다. 아이들의 이와 같은 웃는 모습이 너무나 좋다. 아무리 눈이 큰 아이더라도 눈을 감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영빈이의 웃는 눈을 종이에 그린다면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끝만 살짝 위로 올려주면 되었다. 단순한 선이지만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맑고, 생동감이 넘쳤다.

  짐작대로 유치원은 영빈이의 관심사였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인사말을 건넨 이후 줄곧 잠자코 있던 라온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과 먹고 싶다.”

  내 아이의 최대 관심사는 ‘음식’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수줍음을 벗어던지곤 하는 라온이다. 그 깜찍한 적극성에 피식 웃음이 났다.

  두 다섯 살배기가 내가 마련한 대화의 장에 발을 들였으니, 기분 좋게 거닐게 해주는 게 다음 순서였다. 나의 주특기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로 이야기를 펼쳐갔다.

  “그래. 라온아. 사과 먹고 싶지? 엄마도 먹고 싶다. 엄청 맛있지? 지금은 여름이라 사과가 마트에 없네. 가을이 되면 나올 거니까. 그때 꼭 사 먹자.”

  “엄마, 가을이 언젠데?”

  “여름이 지나면 곧 가을이 와. 우리 라온이가 태어난 가을. 라온이가 9월에 태어났거든. 그러니까 라온이가 태어난 계절은 가을이야. 영빈이는 어떤 계절에 태어났어?”

  다섯 살에게는 어려운 질문일 수 있지만 나는 그냥 물어본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도전적인(?) 질문은 아이의 흥미를 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다.
   영빈이는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실망의 기색이 없고 눈을 반짝이며 내가 힌트를 주길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영빈이는 몇 월에 태어났어? 생일이 언제야?”

  “저는 3월에 태어났어요!”

  “아하. 영빈이는 초봄에 태어났구나. 그럼 영빈이 동생은 몇 월에 태어났어?”

  “라빈이요? 아빠! 라빈이 몇 월에 태어났어?”

  “뭐라고?”

  “라빈이 몇 월에 태어났냐고!”

  접전을 펼치고 있는 배드민턴장의 열기와 헐떡이는 숨소리를 타고 ‘7월’이라는 답이 날아왔다.
   “라빈이는 7월에 태어났어요.”

  “7월이면, 라빈이는 여름에 태어났구나. 라빈이는 아직까지는 여름하고, 가을만 겪어봤네. 겨울하고, 봄을 안 겪었구나. 겨울이 되면 라빈이도 하얀 눈도 볼 수 있고, 봄이 오면 알록달록 봄꽃들도 볼 수 있겠다.”

  “라빈이는 아직 겨울하고, 봄은 몰라요.”

  “그래, 앞으로 겨울이랑, 봄이 오면 영빈이가 라빈이한테 잘 설명해주면 되겠다. 어때?”

  “좋아요!”

  유치원에 대한 질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과일, 생일로 이어지고 계절로까지 뻗어갈 줄은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영빈이가 매우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나와 주고받은 몇 마디를 통해 소중한 경험을 했길 바란다. ‘대화의 기쁨’을 맛보는 일 말이다. 이것은 내가 동심들에게 주고자 노력하는 작은 선물이다.


   동심들이 대화를 통한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쌓길 바란다. 그러면 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어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대화 역량을 올바르게 갖추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서 어른이 되면 우리 사회의 갈등이나 문제가 보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해결되지 않을까?
   동심에게 ‘대화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가만히 보면 어른들이 아이에게 하는 질문이나 이야기는 비슷비슷한 편이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식상하겠는가? 더군다나 그다지 즐거움을 주지 않는 대화라면 참고 있어 주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때문에 나는 주로 기분 좋은 ‘뜻밖의 대화’를 애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외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심에게 ‘대화의 기쁨’을 선물해주고픈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라는 난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