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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Apr 28. 2022

동심이 헌사하는 묘비문

  

동네의 한 아이 이름이 ‘무공’이다. 알고 보니 이순신 장군의 '호'에서 따온 거란다. 저녁 식사 때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해줬더니 라온이와 로운이가 동시에 물었다.

  “호가 뭐야?”

  “이름 대신에 그 사람의 특징을 표현해줄 수 있는 말. 이순신 장군님의 호가 ‘충무공’이거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훌륭한 무사였다는 말이야.”

  “우리는 호가 뭐야?”

  여섯 살 로운이의 말이었다.

  “너희는 아직 없어.”

  “그럼 엄마가 만들어 줘.”

  “흐흐. 그래 한 번 생각해볼게.”

  라온이가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난 ‘천사’라고 해줘.”

  “천사? 멋진걸.”

  여덟 살배기의 깜찍한 요구에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정말로 녀석이 호를 갖는다면 지금 생각으로는 '천사'가 잘 어울렸다.
  이제는 로운이 차례. 상상력이 유난히도 풍부하고 남다른 표현력을 지닌 이 여섯 살 배기는 과연 자신의 호가 무엇이길 바랄까?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아마도 형보다 더 멋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로운이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겨있자 남편이 나섰다.

  “그런데 그건 아이한테는 안 쓰는 거 아닌가?”

  “그래, 얘들아. 보통 호는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을 보고 그걸 잘 나타내는 말로 짓거든.”

  라온이가 물었다.

  “엄마 호는 뭐야?”

  “엄마도 아직은 없어.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호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그 사이 남편이 식사를 마친 후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그때 드디어 로운이가 입을 떼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면, 내가 무덤을 짓고, 거기에 이렇게 써줄게.”

  누군가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하면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심지어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며 다그칠지도……. 하지만 나는 녀석의 이 엉뚱함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토록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과연 이어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몹시 기대됐다.
   “우리를 지켜준 천사.”
   “어머나! 진짜? 로운아! 너무 감동적이다. 고마워.”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로운이의  엉뚱함과 엄마를 향한 사랑, 그리고 기막힌 표현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감동이었다.
   주방에 있던 남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하지만 로운이는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의 다음을 이어갔다.
   “눈이 올 때 엄마 무덤에 눈으로 탑을 쌓고, 그 탑에 무슨 쪽지를 붙일 거야. 그 쪽지에는 ‘우리를 지켜준 천사’라고 쓸 거야. 그런데, 눈이 녹으면 어떡하지?”
   “음…… 그럼 눈 말고, 나무로 하는 건 어때?”
   라온이가 더 좋은 방법을 제안했다.
   “유리로 하자.”
   어린 두 자식이 벌써부터 나의 죽음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도 나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맞장구를 쳐주었다.
   “우와! 유리로 하는 것도 멋지겠다. 깨지지 않는 강화 유리로 하면 좋겠네. 그럼, 아빠는 뭘로 써줄 거야?”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빠 것도 좋은 걸로 해주자.”
   그동안 라온이와 로운이는 항상 나에 대해서는 좋은 표현들을 넘치도록 해주었지만, 아빠에 대해서는 농담을 섞으면서 고약한 표현들을 하곤 했다. 이번만큼은 남편에게도 좋은 말을 해주길 바랐다. 로운이가 잠시 생각 후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빠는 ‘수염이 까칠한 사람’.”
   그동안을 미루어보면 이번에는 그냥저냥 넘어갈 정도의 표현이었다. 그쯤에서 멈추는 게 적당했다. 더 좋은 것을 요구했다간 오히려 남편이 더 실망(?)할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로운이가 나의 무덤 앞에 헌사하겠다는 묘비문을 생각할수록 감동이 커졌다.
   “우리 로운이는 엄마가 로운이를 지켜주는 사람인 거 알아?”
   “응.”
   “그래, 엄마랑 아빠는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를 지켜주는 사람이야. 잘 알지?”
   두 꼬마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함과 안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건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앞으로도 그러겠노라 굳게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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