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딜까?
오늘은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이었다. 하는 일도 위치도 마음에 들었지만, 월급이 턱없이 모자랐기에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일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곳에는 그만두겠다고 2주 전에 미리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예정된 일자리는 없었다. 그동안 하루짜리 알바부터 방송작가까지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모두 서류나 면접에서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날, 일을 마친 후 작별인사를 하고 눈 쌓인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왔다.
저녁 식사를 하러 근처 식당에 들어왔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전화를 받았다.
“N입니다.”
― A 프로그램 류선희 작가예요.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어요. 혹시 다른 프로그램 들어가셨어요?
“아뇨, 들어간 곳 없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의외라는 듯한, 그러나 반가워하는 반응이 느껴졌다.
메인 작가님은 내게 면접 볼 제작사 위치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다가 “아니에요. 지도 앱 보고 찾아오는 게 더 낫겠어요. 찾아오다가 어려우면 저한테 연락해요!”하고 말했다. 작가님의 친근하고 사려 깊은 말에 나는 마음이 푸근해졌다.
통화 후 작가님이 보낸 문자에는 웃는 이모티콘이 있었다. 면접 안내 문자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것이 보통인데, 나는 작가님이 나를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웃는 이모티콘을 넣어 화답했다. 예감이 좋았다.
나는 프로그램의 여러 회차를 보고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하고, 기획 아이템도 몇 가지 생각했다. 지원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프로그램이었지만, 시청해보니 편안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로 일하는 내 모습이 기대됐다.
드디어 면접날. 작가님 말대로 제작사는 길을 찾기 어려웠지만, 나는 일찍 출발했기에 늦지 않고 면접장에 도착했다. 두 분의 메인 작가님이 면접관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막내 작가님이 내게 따뜻한 차를 주었다. 면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예고를 잘 쓸 것 같다, 너무 어리지 않아서 일을 잘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전 직장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업무가 많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곳에 오기 위해 그동안 다른 곳들에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면접은 꽤 길어졌다. 막내 작가 포지션이니만큼 작가님들은 나의 역량보다는 이곳에 적합한 인재인지, 오래 다닐 수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하려 했다. 작가님들은 내가 전 직장을 짧게 다녔고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점 때문에 이곳에 합격해도 오지 않거나 금방 그만둘 것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나를 어필했다.
면접을 마치고 류선희 작가님이 건물 1층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솔직히 나는 N씨랑 하고 싶은데, 우리 팀 다른 분들이랑도 얘기를 해봐야 해서 상의하고 연락드릴게요.”
내가 면접을 못 보진 않았구나! 붙을 가능성이 꽤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 결과는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 아침에 알려준다고 했다.
나는 저녁에 요가수업을 들으러 가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중간중간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혹시 합격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날은 연락이 오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었다. 지원해둘 공고가 여러 곳 있었지만, 그곳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기대감으로 다른 곳에 지원하지 않고 면접 결과를 기다렸다. 오전 10시, 11시… 시간이 늦어갈수록 기대보다는 불안이 커졌다. 경험상 이렇게 연락이 늦어지는 건 좋지 못한 신호였다.
전기장판 위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지척에 두고 있는데, 류선희 작가님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들어가 보니 작가님은 커피와 케이크 기프티콘도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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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씨, 면접에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이야기 나누면서 N씨가 얼마나 멋진 분인지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회의도 길어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다른 분과 함께하게 되었어요.
미안한 마음이에요.
응원의 마음 담아 작은 선물 하나 보내드렸어요.
그리고 하나 조심스럽게 조언하자면,
앞으로 일 구하실 땐 XX 종류의 프로그램보다는
다른 방향의 프로그램을 선택하시는 게
배우는 데도 좋고, 커리어에도 더 도움이 될 거예요.
혹시 궁금한 점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물어보세요.
다음에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
N씨가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 꼭 만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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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에도 되지 않았구나…. 작가님이 좋은 분 같고 프로그램에도 애정이 생겨서 기대가 컸었는데….
연락이 늦어져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결과를 받아드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핸드폰을 놏지 못 하고 메시지를 여러 번 읽는데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반짝반짝.’
내가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딜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작가님이 나를 반짝일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봐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의 메시지는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재능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일반적인 불합격 메시지와는 달랐다. 정말로 나를 좋게 보신 것 같았고 마음이 쓰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답신을 고민하며 메시지를 여러 번 읽는데, 그럴수록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고 실망감과 패배감이 아닌 자신감과 희망이 생겼다. 불합격은 아쉬웠지만, 작가님의 말씀처럼 내가 빛날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작가님에게 따뜻하게 마음 써주셔서 힘내서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신을 보냈다.
며칠 뒤, 귀찮은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 노트북을 챙겨 카페에 갔다. 작가님이 준 기프티콘으로 산 카페라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입사지원서를 고쳐 다른 곳에 지원했다. 그 후로 나는 방송작가 외에도 다양한 직무에 지원해 수십 번의 서류 탈락을 하고 몇 번의 면접을 봤다.
때때로 삶이 정글 같단 생각을 한다. 입시, 취업, 경제활동… 심지어 연애와 결혼에도 ‘시장’이라는 말이 붙으며 계급과 경쟁이 당연시된다. 앞으로도 나의 ‘취준’, 나아가 경제생활에서는 숱한 경쟁과 탈락, 실패의 고배가 놓여있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많은 사람이 나눠 가져야 하니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불가피한 일이겠지.
하지만 다정한 마음만은 한정되지 않는 걸까?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고, 늘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샘처럼. 스쳐 지나갈 한 사람의 지원자에 불과했던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내어준 작가님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온기를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다정함이 정글 같은 삶 속에서 우리를 버티게 해줄 것이다.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취업이나 면접 준비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